온라인 마트에 접속해 시리얼 한 상자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같은 시각, 옆 동네 사는 누군가도 같은 마트에서 같은 시리얼을 담는다. 두 사람이 보는 상품 페이지는 똑같아 보인다. 그런데 장바구니에 찍힌 값이 다르다. 한쪽이 다른 쪽보다 몇백 원 비싸다. 아무도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2025년 12월, 미국의 소비자단체 컨슈머 리포트(Consumer Reports)가 두 시민단체와 함께 이 장면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음을 보였다. 400명이 넘는 자원자가 미국 전역에서 Instacart 주문을 흉내 내 같은 상품의 가격을 모았더니, 점검한 품목의 약 4분의 3이 누가 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값으로 제시됐다. 시리얼, 파스타, 땅콩버터 같은 흔한 물건에서 가장 싼 값과 가장 비싼 값의 차이가 큰 경우 23%에 달했다. 컨슈머 리포트는 이 관행에 이름을 붙였다. 감시 가격(surveillance pricing).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자. 이번에 드러난 건 “당신의 개인정보를 읽어 당신만을 겨냥한 값”까지는 아니다. 같은 시각 여러 손님에게 서로 다른 값을 던져보는 알고리즘 실험에 가깝고, Instacart는 인구통계나 개인 행동으로 가격을 정하지 않는다며 감시 가격이라는 규정 자체를 반박했다(그리고 2026년을 앞두고 문제의 실험 기술 제공을 중단했다). 컨슈머 리포트가 경고한 건 지금 당장의 개인 맞춤이 아니라, 이 실험이 개인의 데이터를 읽어 사람마다 값을 달리 매기는 단계로 자라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였다. 그 앞을 내다보려면, 경제학이 100년 전에 이미 그려둔 극단 하나를 꺼내야 한다.
경제학이 오래전 그린 극단
가격을 손님마다 다르게 매기는 걸 경제학에서는 가격차별(price discrimination)이라고 부른다. 차별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기술적 분류다. 20세기 초 경제학자 아서 피구가 이를 세 갈래로 나눈 뒤로, 그 뼈대는 지금도 교과서에 그대로 있다.
가장 흔한 방식은 눈에 보이는 집단을 나눠 다른 값을 매기는 것이다. 학생 할인, 경로 우대, 지역별 가격이 여기 든다. 조금 더 정교한 방식은 손님이 스스로 고르게 만드는 것이다. 쿠폰이 대표적이다. 쿠폰을 오려 오는 수고를 감수하는 사람은 가격에 민감하다는 뜻이니, 그 사람에게만 싸게 파는 셈이다. 파는 쪽은 누가 민감한지 직접 알아낼 필요가 없다. 손님이 행동으로 자기를 분류해준다.
그리고 가장 극단이 완전 가격차별이다. 경제학에서 1도(first-degree) 가격차별이라 부르는 것으로, 파는 쪽이 손님 한 명 한 명이 낼 수 있는 최대 금액, 곧 얼마까지 낼 의향이 있는지(이를 지불용의라 부른다)를 정확히 알아내 딱 그 값을 부른다. 그 최대치를 남김없이 받아내는 것이다.
이 그림이 왜 완전 가격차별이 극단인지 보여준다. 원래 하나의 가격이 매겨지면, 그 값보다 더 낼 뜻이 있었던 사람은 이득을 본다. 만 원까지 낼 생각이었는데 오천 원에 샀다면, 차액 오천 원이 그 사람 몫으로 남는다. 이 몫을 다 합한 것을 소비자 잉여라고 부른다. 완전 가격차별은 이 잉여를 통째로 걷어간다. 각자에게 각자의 최대치를 부르니, 남는 이득이 없다. 경제학 교과서는 이 완전 가격차별을 소개할 때 늘 같은 단서를 단다.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파는 쪽이 손님의 속마음, 곧 얼마까지 낼 의향이 있는지를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알 길이 없다”가, 데이터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
사실 이건 새롭지 않다
값을 사람마다 다르게 매기는 일 자체는 유서 깊다. 정찰제 가격표가 없던 시절, 시장에서 물건값은 흥정으로 정해졌다. 상인은 손님의 옷차림과 말투와 망설임을 읽어 값을 불렀다. 이건 조잡하게나마 개인별 가격이었다.
더 정교한 형태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미국 대학의 등록금이 그렇다. 정가는 높게 붙여두고, 재정지원 신청서로 각 가정의 형편을 받아본 뒤 학생마다 실제 낼 금액을 다르게 매긴다. 경제학자들은 이걸 완곡한 복지가 아니라 명백한 가격차별로 본다. 신청서가 곧 지불용의를 알아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넉넉한 가정이 낸 높은 등록금이,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낮은 등록금을 메운다.
그러니 개인별 가격은 발명품이 아니다. AI가 바꾼 건 값을 다르게 매긴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걸 알아내는 방식이다. 세 가지가 달라졌다. 규모가 달라졌다. 흥정하는 상인이 읽던 단서가 서넛이었다면, 지금은 신호가 수백 개다. 속도가 달라졌다. 값이 클릭 한 번마다 다시 계산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칭이 깨졌다. 시장의 흥정에서는 상인도 손님을 보고 손님도 상인을 봤다. 지금은 한쪽만 본다. 당신은 당신이 저울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어떤 신호로 당신을 재는가
그렇다면 기업은 실제로 무엇을 보고 값을 매길까. 미국의 소비자 보호 기관인 연방거래위원회(FTC)가 이 관행이 얼마나 퍼졌는지 파고들었다. 2024년 7월, 여러 소매업체의 가격 책정을 대행하는 중개 기업 여덟 곳에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쓰는지 밝히라고 명령했고, 이듬해 1월 그 예비 결과를 내놓았다. 거기 적힌 신호 목록이 이 저울의 눈금을 짐작하게 한다. 정확한 위치, 검색과 구매 이력, 심지어 웹페이지 위에서 마우스가 움직인 궤적, 장바구니에 담아뒀다가 사지 않은 물건까지. 당신에 관해 알아낸 것이 많을수록 당신이 얼마까지 낼지를 더 좁게 추정할 수 있다는 논리다.
옛 사례 하나가 이 원리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2012년, 여행 예약 사이트 오르비츠(Orbitz)가 맥 이용자에게 더 비싼 호텔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맥 이용자가 윈도우 이용자보다 숙박비를 하루 평균 20~30달러 더 쓰고, 고급 호텔을 예약할 확률이 높다는 데이터에 근거한 것이었다. 다만 정확히 하자면 오르비츠는 같은 방을 맥 이용자에게 더 비싸게 판 게 아니라, 비싼 방을 먼저 눈에 띄게 배치했다. 값을 바꾼 게 아니라 시야를 바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자주 인용되는 건, 쓰는 기기라는 사소한 신호 하나로 지갑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는 발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배터리 잔량 같은 더 은밀한 신호도 오래 거론돼 왔다. 배터리가 얼마 안 남은 사람은 급한 처지라 웃돈을 더 받아들일 것이라는 이야기다. 다만 실제로 그렇게 요금을 매긴다는 확증은 없고, 관련 기업들은 부인한다. 그럼에도 캘리포니아는 2025년 배터리 잔량이나 기기 종류로 값을 올리는 것을 아예 금지하는 법안을 냈다. 아직 벌어지지 않았더라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정찰제라는 짧은 예외
여기서 한 발 물러서면 흥미로운 그림이 보인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정찰제, 그러니까 물건에 가격표가 붙어 있고 누구에게나 같은 값이라는 원칙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상점의 값은 흥정으로 정해졌다. 1861년 필라델피아에서 존 워너메이커가 상점을 열며 “하나의 값, 그리고 반품 보장”을 내걸었다. 퀘이커교도였던 그는 하느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듯 모두가 같은 값을 내야 한다고 봤다. 워너메이커가 가격표를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가격표를 대중화해 상거래의 표준으로 굳히면서 흥정은 뒷방으로 물러났다.
관점을 넓혀 보면, 가격표가 붙어 모두 같은 값을 내는 시대는 상업의 긴 역사에서 겨우 150년쯤 되는 예외일지 모른다. 그전 수천 년은 흥정의 시대였다. 그렇다면 감시 가격은 새로운 괴물이라기보다, 잠깐 쉬어 간 정찰제를 지나 원래의 흥정으로 돌아가는 흐름에 가깝다. 다만 이번 흥정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값을 부르는 쪽만 상대를 볼 수 있다.
왜 유독 이 불공정을 못 견디는가
흥정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뿐이라면, 왜 우리는 이 흥정을 유독 못 견딜까. 사람들은 값이 오르는 것 자체보다, 값이 오르는 이유에 반응한다. 1986년 대니얼 카너먼과 두 동료가 한 실험이 이걸 깔끔하게 보여줬다. 눈보라가 지나간 다음 날 아침, 철물점이 눈삽 값을 15달러에서 20달러로 올렸다면 어떤가. 이 상황을 설문으로 묻자 응답자의 82%가 불공정하다고 답했다. 값을 올린 것 자체가 아니라, 남의 급한 사정을 이용해 올렸다는 게 문제였다. 원가가 올라 값을 올리는 건 사람들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상대가 궁지에 몰렸다는 이유로 더 받는 건 착취로 느낀다.
감시 가격은 정확히 이 지점을 건드린다. 당신이 더 낼 수 있어 보이니 더 받는다는 것, 그게 바로 사람들이 가장 못 견디는 종류의 가격 인상이다. 게다가 상대는 그걸 숨긴다.
이 불쾌감이 어떻게 터지는지는 2000년에 이미 봤다. 아마존이 같은 DVD를 손님마다 다른 값에 파는 실험을 하다 들켰다. 한 이용자가 브라우저 쿠키를 지우자 26.24달러였던 값이 22.74달러로 떨어졌다. 아마존은 그것이 손님을 겨냥한 게 아니라 무작위로 할인율을 달리해 본 실험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같은 물건에 남과 다른 값을 치렀다는 사실 앞에서, 그 값이 어떻게 정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반발은 거셌고, 아마존은 사과하며 6,896명에게 평균 3.10달러씩 돌려줬다. 사람들이 분노한 단어는 불공정보다 “속았다”에 가까웠다. 값이 다르다는 사실보다, 그걸 몰랐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 아마존은 그 뒤로 20년이 넘도록 개인별 가격을 쓰지 않는다고 밝혀 왔다.
그런데 무조건 나쁜가
그렇게 분노할 만하다. 그런데 한 가지는 정직하게 짚고 가야 한다. 개인별 가격이 늘 소비자를 등쳐먹기만 하는 건 아니다.
한 경제학 연구(장피에르 뒤베와 산조그 미슈라)가 실제 현장 실험을 분석했더니, 개인화 가격 아래에서 오히려 60%가 넘는 소비자가 균일가격일 때보다 더 싸게 샀다. 지불용의가 낮은 사람에게는 낮은 값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값을 낮춰 시장에 들어오게 만드는 것, 대학 등록금이 형편에 따라 갈리는 것과 같은 논리다. 그래서 후생의 관점에서 개인화 가격은 한쪽으로만 나쁘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방향은 못 박아 두자. 많은 사람이 더 싸게 사더라도, 지갑이 두둑한 소수에게서 더 크게 걷어가기 때문에 소비자 전체로는 손해다. 같은 연구에서 전체 소비자 잉여는 균일가격 때보다 약 23% 줄었다. 가장 많이 낼 뜻이 있던 사람들의 몫이 판매자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흔한 혼동도 짚어야 한다. 항공권이나 승차 호출 요금이 시간과 수요에 따라 오르내리는 것을 두고 감시 가격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 둘은 다르다. 성수기에 값이 오르는 동적 가격은 그 순간 모두에게 같은 값이다. 감시 가격은 같은 순간 사람마다 다른 값이다. 옹호하는 쪽은 종종 앞의 정당성으로 뒤를 감싼다. 붐빌 때 값이 오르는 건 당연하지 않냐고. 그러나 붐비는 것과 당신이 오늘 급해 보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영국 중앙은행이 2026년 내놓은 분석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아직 개인화 가격이 전체 물가를 눈에 띄게 올렸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값이 사람마다 시시각각 달라지면, 사람들은 앞으로 자기가 낼 값이 더 오를 거라 예상하게 된다. 그렇게 오를 것을 내다본 이들이 서둘러 지갑을 열고 판매자가 거기 맞춰 값을 올리면, 그 예상이 스스로 실제 물가를 밀어 올릴 수 있다는 경고다. 실제로 조사에 응한 가계의 44%가 기업의 이런 가격 기술 때문에 자신이 낼 값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답했다. 개인의 지갑을 넘어, 값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두고 우리가 공유하던 감각이 흔들리는 셈이다.
저울은 이미 기울어 있다
감시 가격이 아직 완성된 미래는 아니다. FTC의 조사는 예비 단계에서 정권이 바뀌며 동력을 잃었고, Instacart는 문제의 실험을 접었으며, 기업들은 하나같이 개인 데이터로 값을 매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경제학이 그린 완전 가격차별의 실현은 여전히 이론 속 극단이다. 사람의 속마음은 데이터로도 끝내 다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방향은 또렷하다. 미국에서는 2026년 중반까지 24개가 넘는 주에서 40건 넘는 관련 법안이 나왔다. 뉴욕은 알고리즘 가격을 쓸 때 그 사실을 알리도록 했고, 메릴랜드는 아예 금지에 나섰다. 규제가 이렇게 서두른다는 건, 저울이 이미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를 모두가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진짜 불편한 건 값이 오른다는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 앞서 봤듯 개인별 가격은 누군가에겐 오히려 더 싼 값을 안기고, 다수가 이득을 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것을 못 견디는 건, 눈삽 실험이 말해주듯 값 자체가 아니라 내 사정이 이용당했다는 느낌, 그리고 그 저울이 도는 것을 나만 보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값을 재는 시선은 늘 있었다. 흥정하던 시장에서도 상인은 당신을 살폈다. 달라진 건 그 시선이 이제 한 방향이라는 것이다. 상대는 당신의 위치와 습관과 망설임을 읽는데, 당신은 자기 이름표에 얼마가 적혀 있는지조차 볼 수 없다. 가격표가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싼값이 아니라, 애초에 내가 저울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 권리인지도 모른다. 그다음 질문은 이거다. 그 저울을 우리도 마주 볼 수 있게 만들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