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 쓰던 앱을 오랜만에 연다. 예전엔 첫 화면에 친구들 소식이 떴는데, 지금은 광고와 모르는 사람의 추천 영상이 먼저 쏟아진다. 검색창에 물건 이름을 넣으면 맨 위 네댓 줄은 스폰서 딱지가 붙은 결과다. 진짜 찾던 건 한참 아래에 있다. 서비스가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은 기분 탓이 아니다. 그리고 그게 이 회사만의 일도 아니다. 소셜미디어도, 검색도, 쇼핑도, 스트리밍도, 어느 순간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방향으로 나빠졌다.
이 공통된 몰락에 2022년 캐나다 작가 코리 닥터로(Cory Doctorow)가 이름을 붙였다. 인쉬티피케이션(enshittification). 우리말로 옮기면 ‘똥망화’ 정도 되는 거친 조어인데, 이 단어는 이듬해 미국방언학회(American Dialect Society)의 올해의 단어로 뽑혔고, 2024년에는 호주 매쿼리 사전도 같은 선택을 했다. 사람들이 이 험한 말을 반긴 이유는 하나였다. 자기가 겪고 있으면서도 이름을 몰랐던 현상에 드디어 이름이 생겼기 때문이다.
닥터로의 주장에서 중요한 건 단어의 세기가 아니다. 플랫폼이 나빠지는 게 개별 경영진의 탐욕이나 우연한 실책이 아니라, 정해진 궤도를 따르는 구조적 현상이라는 진단이다. 그는 2025년 같은 제목의 책까지 냈다. 좋았던 것이 왜 갑자기 나빠졌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플랫폼은 이렇게 죽는다
닥터로는 플랫폼의 일생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플랫폼이 죽는 방식은 이렇다. 처음엔 사용자에게 잘해준다. 그다음엔 사용자를 학대해 비즈니스 고객을 이롭게 한다. 마지막엔 그 비즈니스 고객마저 학대해 모든 가치를 자기 몫으로 긁어간다.”
핵심은 플랫폼이 가치를 누구에게 몰아주느냐가 단계마다 바뀐다는 것이다. 처음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다 단골이 되고 나면 슬슬 등쳐먹는 장터를 떠올리면 쉽다. 다만 이 장터에는 손님이 두 종류다. 물건을 사러 오는 사용자, 그리고 그 사용자에게 뭔가를 팔려고 자리를 편 비즈니스 고객(판매자, 광고주, 창작자).
첫 단계에서 플랫폼은 사용자에게 아낌없이 베푼다. 광고 없는 피드, 정확한 검색, 싼값. 투자자의 돈을 태워서라도 사용자를 끌어모은다. 사용자가 충분히 쌓이고 쉽게 떠나지 못하게 되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간다. 이제 사용자 경험을 조금씩 갉아 그 잉여를 비즈니스 고객에게 넘긴다. 판매자에게는 더 많은 노출을 팔고, 광고주에게는 사용자를 더 정밀하게 겨냥할 수단을 판다. 이때 양쪽은 서로의 인질이 된다. 참여자가 많을수록 가치가 커지는 네트워크 효과 탓에, 사용자가 많아서 판매자가 못 떠나고 판매자가 다 모여 있어 사용자도 못 떠난다. 그렇게 비즈니스 고객까지 플랫폼에 묶이고 나면, 마지막 단계가 온다. 양쪽 모두에게서 짜낼 수 있는 것을 짜내 주주에게 돌린다. 남는 건 껍데기뿐이고, 그다음은 붕괴다.
왜 우연이 아니라 구조인가
여기까지는 냉소적인 관찰처럼 들린다. 원래 회사는 돈 벌면 나빠지는 거 아니냐고. 닥터로의 이론이 그냥 냉소와 다른 건, ‘왜 반드시 이 순서로 무너지는가’까지 설명하기 때문이다. 방아쇠는 락인(lock-in), 곧 사용자가 쉽게 떠나지 못하게 되는 상태다.
떠날 수 있는 손님에게 회사는 잘해줄 수밖에 없다. 조금만 실망시켜도 경쟁사로 가버리니까. 그런데 친구가 전부 그 앱에 있고, 몇 년치 데이터가 그 안에 쌓여 있고, 일하는 방식 자체가 그 도구에 맞춰져 있으면, 사용자는 불만이 있어도 못 떠난다. 이 순간 회사의 셈법이 뒤집힌다. 품질을 유지하는 건 비용이 들고, 못 떠나는 손님을 쥐어짜는 건 곧장 이익이 된다. 잘 만드는 일이 덜 중요해지는 것이다.
닥터로는 이 쥐어짜기에 트위들링(twiddling)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른 목표는 제쳐두고 오직 이윤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시스템의 손잡이를 쉼 없이 돌려 조건을 미세하게 바꾸는 일이다. 오늘은 이 사용자에게 보이는 가격을 살짝 올려보고, 내일은 저 판매자의 노출을 조금 줄여본다. 디지털 플랫폼은 이 손잡이를 실시간으로, 사람마다 다르게 돌릴 수 있다. 무엇이 바뀌었는지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조직 안에서도 같은 힘이 작동한다. 팀은 실제 사용자가 얻는 가치가 아니라 대시보드의 숫자를 최적화하고, 품질을 지키던 고객지원과 검수 인력은 ‘비용’으로 분류돼 잘려나간다. 나쁜 소식을 보고하는 일은 위험해지고, 스스로를 바로잡는 능력이 사라진다. 그래서 닥터로는 이 몰락을 무능의 결과가 아니라 ‘효율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합리적 착취’라고 부른다.
무엇이 플랫폼을 붙잡고 있었나
그렇다면 예전 플랫폼은 왜 이 지경까지 가지 않았을까. 닥터로는 회사를 얌전하게 붙들어두던 네 개의 힘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 동안 그 넷이 하나씩 풀려버렸다는 것이 그의 진짜 논점이다. 앞서 본 락인도 실은 이 넷이 풀린 자리에서 자란다. 사용자를 붙드는 힘이 새로 세진 게 아니다. 떠나게 해주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졌을 뿐이다.
첫째는 경쟁이다. 사용자가 언제든 경쟁사로 갈아탈 수 있으면, 회사는 품질을 낮추거나 값을 올리기를 겁낸다. 그러나 인수합병으로 경쟁자를 사들이거나 문 닫게 만들면서, 이 압력이 사라졌다.
둘째는 규제다. 규제 당국이 부과할 벌금이 부정으로 얻을 이익보다 크면, 회사는 덜 속인다. 그러나 거대 플랫폼이 규제 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규제 포획이 진행되면서, 이 위협도 무뎌졌다.
셋째는 자기구제, 곧 사용자 스스로 대항하는 힘이다. 광고 차단기를 깔고, 제품을 뜯어보고, 호환되는 대체 도구를 만들어 회사가 심어둔 불리한 장치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닥터로는 이를 적대적 상호운용성(adversarial interoperability)이라 부른다. 그런데 미국의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DMCA) 1201조 같은 규정이 이런 우회를 사실상 불법으로 만들었다. 합법이던 대항을 범죄로 돌려놓은 이 조항을 두고, 그는 ‘사업모델을 모독한 죄’냐고 비꼰다. 그 결과가 상징적이다. 닥터로가 드는 대비로는, 웹에서는 사용자의 절반 가까이가 광고 차단기를 쓰지만 앱 안에서는 그 비율이 0에 가깝다. 앱은 뜯어고치는 것 자체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노동자다. 기술 인력이 협상력과 사명감을 갖고 있을 때는, 경영진이 제품을 망가뜨리라고 요구해도 엔지니어들이 차라리 그만두겠다며 버텼다. 대량 해고가 이 지렛대를 앗아갔다.
네 개의 빗장이 모두 풀리자, 플랫폼은 사용자를 희생시켜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는 길에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게 됐다. 닥터로가 나쁜 회사와 좋은 회사를 나누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탐욕스러운 개인을 찾아내 탓하는 걸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막던 장치가 사라지면 평범한 회사도 같은 길을 간다.
아마존이라는 표본
추상적인 이야기를 구체적인 사례로 내려보면 아마존이 좋은 표본이다. 검색창에 물건을 넣으면 맨 위에 뜨는 상품은 대개 가장 싼 것도 가장 좋은 것도 아니다. 닥터로가 즐겨 드는 예를 보면, 그 자리를 사려고 판매자가 치른 광고비가 상품값에 얹혀 있고, 정작 더 나은 조건의 상품은 한참 아래에 묻히곤 한다. 사용자가 맨 위를 믿고 누르는 습관, 그 습관이 곧 팔 물건이 된 셈이다.
이 자리 장사는 이미 거대하다. 아마존이 판매자에게 검색 노출을 파는 광고 사업은 연 수백억 달러 규모로 자랐다. 사용자에게는 검색 품질의 저하로, 판매자에게는 노출을 사야만 하는 비용으로 돌아오는 그 부담이, 회사에는 그대로 수익이 된다. 사용자를 갈아 판매자에게 넘기는 두 번째 단계와, 그 판매자마저 갈아 자신에게 거두는 세 번째 단계가 한 화면 안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것이다.
이 이론은 어디까지 맞는가
한 가지는 정직하게 짚고 가야 한다. 인쉬티피케이션은 강력한 렌즈이지만,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믿는 순간 오히려 흐려진다.
첫째, 이 단어는 너무 잘 들어맞아서 남용되기 쉽다. 요즘은 서비스가 조금만 불편해져도 인쉬티피케이션이라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닥터로의 정의는 훨씬 좁다. 락인을 무기로, 사용자에서 비즈니스 고객으로, 다시 자신에게로 가치가 단계적으로 이동하는 특정한 궤적을 가리킨다. 그냥 값이 오르거나 품질이 떨어지는 모든 일이 여기 해당하는 건 아니다.
둘째, 몰락이 정말 불가피한지는 이론의 예측이지 증명된 법칙은 아니다. 위키피디아나 리눅스처럼 이 궤도에 오르지 않은 사례가 있다. 이들이 안전한 건 마음씨가 착해서가 아니라, 사용자가 언제든 내용이나 소스를 통째로 들고 떠날 수 있어서다. 붙잡을 수 없으니 짜낼 수도 없다. 락인이 약하거나, 네 견제력 중 하나라도 살아 있으면 궤도는 달라진다. 그렇다면 인쉬티피케이션은 운명이라기보다, 특정 조건이 갖춰졌을 때 켜지는 경향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이론이 값진 건, 나빠진 서비스 앞에서 우리가 흔히 하는 두 가지 오해를 동시에 걷어내기 때문이다. 하나는 ‘내가 예민한 탓’이라는 자책이고, 다른 하나는 ‘저 회사 경영진이 유독 탐욕스럽다’는 인신공격이다. 닥터로는 둘 다 틀렸다고 말한다. 당신의 체감은 정확하고, 문제는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브레이크가 빠진 구조라는 것이다.
브레이크는 어디에
닥터로가 냉소에서 멈추지 않는 건, 몰락을 구조로 진단하면 처방도 구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풀려버린 네 개의 빗장을 다시 거는 것, 곧 경쟁을 회복시키고, 규제에 이빨을 달고, 사용자가 떠나거나 대항할 권리를 돌려주고, 만드는 사람의 힘을 세우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그가 특히 무게를 싣는 건 떠날 권리, 곧 락인을 깨는 상호운용성이다. 내 데이터를 들고 언제든 나갈 수 있으면, 회사는 다시 나를 붙잡기 위해 잘해줄 수밖에 없다. 락인이 셈법을 뒤집는 스위치였다면, 그 스위치를 반대로 돌리는 일이다.
그런데 처방을 알아도 마음이 개운치 않은 건, 정작 지금 나를 붙잡고 있는 것들을 떠올려 보면 하나같이 쉽게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거기 있고, 사진이 거기 쌓였고, 일하는 방식이 거기 맞춰져 있다. 떠날 권리가 처방이라는 말은, 우리 대부분이 아직 떠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금 당신에게 유난히 잘해주는 서비스가 하나 떠올랐다면, 그건 좋은 소식이면서 물어볼 만한 일이다. 잘 대접하고, 갈아 넘기고, 끝내 짜내는 그 세 단계에서 저 친절은 지금 어디쯤에 서 있을까. 농부가 황금알을 세는 동안, 거위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