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AI 에이전트한테 일을 많이 맡긴다. 코드를 짜고, 자료를 찾고, 초안을 쓰는 일을 시키면 빠르고 곧잘 해낸다. 분명 전보다 훨씬 많은 일을 처리하게 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상한 걸 깨달았다. 처리량은 늘었는데, 내 사고의 폭은 조금도 넓어지지 않았다.
장면 하나. 에이전트에게 까다로운 버그를 맡겼더니 몇 분 만에 고쳐서 돌려준다. 코드는 멀쩡히 돌아간다. 그런데 “왜 그게 문제였고 왜 이 수정이 맞느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결과물은 내 손에 있는데 그걸 떠받치는 이해는 내 머리에 없다. 일은 끝났지만, 나는 그 일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위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가 보인다. 위임된 건 생각의 실행이다. 정보를 모으고, 코드를 쓰고, 문장을 뽑아내는 노동. 위임되지 않은 건 그 일을 떠받치는 이해다.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정의하고, 여러 길 중 왜 이 길인지 판단하고, 끝내 책임지고 결정하는 일. 앞쪽은 남에게 넘겨도 결과가 나오지만, 뒤쪽은 넘기는 순간 내 안에서 그냥 비어버린다.
두 사람이 100년을 사이에 두고 이 경계를 똑같이 짚었다.
“You can outsource your thinking, but you can’t outsource your understanding.” — 안드레이 카르파시 (테슬라 AI 디렉터를 지낸 딥러닝 연구자)
“지식은 전할 수 있어도, 지혜는 전할 수 없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1922)
카르파시가 말한 thinking(생각의 실행)과 헤세가 말한 knowledge(지식)는 결이 같다. 둘 다 남에게 건네지는 것이다 — 작업으로든 문장으로든 옮길 수 있다. 반대로 understanding(이해)과 wisdom(지혜)은 건네지지 않는다. 직접 겪고 따져본 사람의 안에서만 자란다. 강 건너는 법을 백 번 들어도, 정작 물살을 직접 받아본 사람의 그 감각만은 전해 받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싯다르타』가 끝내 강가에서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인 건 우연이 아니다.
100년 사이에 달라진 건 하나다. 건넬 수 있는 표면, 곧 생각의 실행이 비교할 수 없이 쉽고 싸졌다. 헤세의 시대에 지식을 옮기려면 책과 스승이 필요했고, 카르파시 이전엔 코드 한 줄도 사람이 직접 짰다. 지금은 그 표면을 통째로 에이전트에 떠넘길 수 있다. 그래서 착각하기 쉽다. 표면이 이렇게 쉬워졌으니 깊이도 함께 따라왔겠거니. 하지만 건너지지 않는 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건너지지 않는다. 도구가 좋아질수록 표면과 깊이의 간격은 오히려 벌어진다.
그래서 요즘은 일을 넘기기 전에 한 번 멈춘다. 이 일에서 문제를 정의하고, 길을 고르고, 결정하는 자리 — 거기에 내가 있는가, 아니면 결과만 받아 들고 이해는 비워둘 셈인가. 답이 께름칙하면, 느리더라도 에이전트와 함께 한 단계씩 추론하며 간다. 속도를 조금 내주는 대신 이해를 내 쪽에 남기는 거래다.
빨라지는 건 늘 표면이다. 깊이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직접 건너야 한다.
— tom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