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엔비디아는 CUDA를 내놓는다. 그래픽 칩을 게임 너머의 범용 계산에 쓸 수 있게 해주는 소프트웨어였다. 문제는 그걸 살 시장이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AI’는 학계에서도 한물간 단어였고, 딥러닝은 긴 겨울을 지나고 있었다. 게임 칩을 파는 회사가 당장 돈도 안 되는 범용 컴퓨팅 소프트웨어에 막대한 연구비를 쏟자, 시장은 마진을 깎아먹는다고 비판했다.

젠슨 황은 이런 곳을 두고 “Zero Billion Dollar Market(0조 원 시장)“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시장 규모가 0원이지만, 방향이 맞다고 믿는 곳이다. 그의 전략은 여기서 갈린다. 대부분의 기업은 이미 큰 시장에 들어가 점유율을 다툰다. 황은 반대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장에 먼저 들어가 그 시장 자체를 키운다.

1999 GPU 보조칩을 프로세서로 2006 CUDA 6년 기다림 → 2012 AI 지금 로봇 0원 시장 인프라 먼저
세 번 모두 같은 구조다. 시장이 0원일 때 인프라를 먼저 깔고, 그 시장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다.

시장이 없던 6년

엔비디아는 CUDA를 깔아두고 6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 6년 동안 엔비디아는 CUDA를 대학과 연구소에 적극적으로 뿌렸다. 무료로 풀고, 강의 자료를 만들고, 연구자들이 GPU로 논문을 쓰도록 지원했다. 그전까지 GPU로 일반 계산을 하려면 끔찍한 우회가 필요했다. 일반 연산 문제를 억지로 ‘그래픽을 그리는 문제’로 위장해 그래픽 API를 속여야 했다. 물리 시뮬레이션을 돌리려고 “이것은 픽셀을 칠하는 작업”이라고 칩을 속이는 식이었다. CUDA는 그 위장을 없애고, 개발자가 C 언어로 GPU에 직접 일반 연산을 시키게 해주었다.

전환점은 2012년에 왔다. 토론토대학의 한 팀이 게임용 그래픽카드 두 장으로 신경망(훗날 ‘AlexNet’으로 불린다)을 학습시켜, 이미지넷(ImageNet)이라는 이미지 인식 대회를 압도적인 격차로 석권했다. 그 순간 모두가 깨달았다. 딥러닝을 현실적으로 학습시키려면 GPU가 필요하고, 그 GPU를 제대로 부릴 소프트웨어까지 갖춘 칩은 엔비디아뿐이었다.

여기서 엔비디아가 돈을 버는 구조가 드러난다. CUDA 자체는 공짜였지만, CUDA로 짠 프로그램은 엔비디아 GPU 위에서만 돌아갔다.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풀어 생태계를 잠그고, 정작 돈은 그 위에서 돌려야 하는 GPU 칩을 팔아 버는 것이다. 그렇게 6년 전 깔아둔 보이지 않는 통행료 위로, AI라는 황금 마차가 지나가기 시작했다.

행운이었나

여기까지만 보면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일이 황의 경력에서 반복된다는 점이 그 해석을 흔든다.

1999년, 엔비디아는 GeForce 256을 내놓으며 GPU(Graphics Processing Unit)라는 단어 자체를 만들었다. 그전까지 그래픽 칩은 CPU를 거드는 보조 부품이었다. 황은 위치·조명 계산을 칩 안으로 끌어들이고는 “이것은 보조 칩이 아니라 독립된 프로세서”라고 선언했다. 단어 하나로 시장의 인식 프레임을 바꾼 것이다. 한때 3D 그래픽의 절대 강자였던 3dfx는 이듬해 무너져 엔비디아에 인수됐다.

2006년의 CUDA는 그다음 베팅이었다. 그리고 지금, 황은 세 번째 같은 수를 두고 있다. 피지컬 AI, 곧 현실 세계에서 움직이는 로봇이다. 화면 속 텍스트와 이미지를 다루던 AI를 물리적 몸으로 끌어내겠다는 것이다. 그는 휴머노이드 로봇과 노동 자동화를 거대한 미래 시장으로 보고, 로봇을 가상에서 수백만 번 훈련시키는 시뮬레이션 플랫폼(Omniverse)과 아무 회사의 로봇에나 올라가는 범용 로봇 두뇌(GR00T)를 미리 깔고 있다. 로봇 시장이 아직 거의 0원인 지금 말이다.

세 번 모두 구조가 같다. 시장이 생기기 전에 인프라를 깔고, 그 시장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나

첫째는 방향에 대한 베팅이다. 황은 AI가 올 것을 안 게 아니다. “병렬 연산이 언젠가 중요해진다”는 가설에 걸었을 뿐이다. AI는 그 방향으로 도착한 여러 결과 중 하나였다. 핵심은 결과를 맞힌 게 아니라, 방향을 정해두고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둘째는 시간을 견디는 구조다. 황은 1993년 창업 이래 30년 넘게 같은 회사의 CEO다. 통계적으로 극히 드문 일이고, 이것이 첫째를 가능하게 한 토대다. CUDA처럼 10년 뒤에야 열매를 맺는 투자는, 10년 뒤에도 자신이 책임진다는 주인이 아니면 밀어붙일 수 없다. 분기 실적에 쫓기는 전문경영인은 구조적으로 못 하는 베팅이다.

셋째는 편집증적 위기감이다. 황의 사내 만트라는 “우리 회사는 늘 폐업 30일 전이다”라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엔비디아는 초기에 몇 번이나 망할 뻔했다. 위기를 넘긴 뒤 안도하는 대신, 그는 그 긴장을 영구적인 경영 도구로 박제했다.

0원의 본질

0원짜리 시장에 미리 무언가를 까는 일은, 당장은 비용일 뿐이다. 욕먹는 비용, 마진을 깎는 비용,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그러나 방향이 맞아 시장이 도착하는 순간, 그 비용은 누구도 단숨에 따라잡을 수 없는 통행료로 바뀐다.

그래서 가장 큰 베팅은 종종 시장이 생기기 전에 이미 끝나 있다. 파도가 보일 때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파도가 칠 자리에 미리 보드를 띄워두는 일이다. 0원이라는 숫자는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값을 매기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다. 그 둘을 구분하는 눈이, 30년에 걸쳐 같은 수를 세 번 두게 만든 힘이었다.

— tom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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