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던 걸 손에 넣은 직후를 떠올려 보자. 오래 벼르던 물건이든, 옮기고 싶던 회사든, 며칠은 분명히 좋다. 그러다 어느새 그게 당연한 풍경이 되고, 마음은 벌써 다음 무언가를 곁눈질한다. 채워지면 기쁨이 오래갈 줄 알았는데, 정작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묘한 공허다. 이 끝나지 않는 쳇바퀴를 두 철학자가 정면으로 들여다봤다. 한 사람은 거기서 “그러니 삶은 고통”이라는 결론을, 다른 사람은 “그러니 욕망을 줄이면 평온하다”는 처방을 끌어냈다.
쇼펜하우어와 에피쿠로스다. 기질로 보면 정반대다. 한쪽은 철저한 염세주의자, 한쪽은 정원에서 빵과 물로 만족한 낙천가. 그런데 두 사람의 진단은 놀랍도록 겹친다. 이 글은 그 겹치는 자리를 파고든다. 쇼펜하우어의 어두운 통찰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에피쿠로스의 밝은 태도로 끝맺을 수 있는지를 따져보려는 것이다. 미리 말하면 둘은 섞인다. 매듭은 딱 한 군데다.
쇼펜하우어의 ‘의지’ — 나를 떠미는 맹목적인 힘
먼저 쇼펜하우어의 핵심 개념부터. 그는 세계의 겉모습 아래에 하나의 근본 실재가 있다고 봤고, 그것을 ‘의지(Wille)‘라 불렀다. 오해하기 쉬운데, 여기서 의지는 “오늘 운동을 하겠다” 같은 개인의 결심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크고 비인격적인 것, 모든 것을 살아 있게 하고 자라게 하고 갈망하게 만드는 맹목적인 충동이다.
씨앗이 흙을 뚫고 올라오는 힘, 동물이 먹이를 쫓는 힘, 사람이 무언가를 끝없이 원하는 힘이 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이 의지에는 목적도 이유도 없다. 그저 원할 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만족을 모른다. 하나를 채우면 곧장 다음을 원한다. 채우는 게 의지의 목적이 아니라, 원하는 것 자체가 의지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비유가 나온다. 인간은 이 의지에 올라탄 존재여서, 삶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과 같다. 부어도 부어도 차지 않는다. 독을 채우는 게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채우는 순간 바닥이 또 빠지기 때문이다.
결핍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
이 의지론에서 그의 가장 날카로운 통찰이 따라 나온다. 삶이 왜 고통인지를 그는 아주 구체적인 구조로 설명한다.
무언가를 원하지만 아직 갖지 못한 상태, 이것이 결핍이다. 부족하니 괴롭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 손에 넣으려 애쓴다. 그런데 막상 손에 넣으면 어떻게 되나. 원하던 대상이 사라지면서, 그 대상을 향하던 의지가 갈 곳을 잃는다. 이 텅 빈 상태가 권태다.
쇼펜하우어의 표현을 빌리면,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진자처럼 오간다. 한쪽 끝은 결핍의 고통, 다른 쪽 끝은 권태의 공허. 욕망을 못 채우면 결핍으로 괴롭고, 채우면 권태로 공허하다. 시계추는 잠깐 충족의 한가운데를 스쳐 갈 뿐, 어느 쪽 끝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
이게 왜 통찰이냐면, 권태를 단순한 심심함이 아니라 충족의 필연적 뒷면으로 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원하는 걸 다 가지면 행복할 거라 믿는다. 쇼펜하우어는 정반대를 말한다. 원하는 걸 다 가진 바로 그 지점에서 권태가 시작된다고. 부유한 사람들이 권태를 죽이려 사냥과 도박과 자극을 찾아다니는 게 그 증거다.
에피쿠로스는 왜 빵과 물로 충분하다 했나
이제 반대편. 에피쿠로스는 흔히 ‘쾌락주의자’로 불리지만, 그가 권한 삶은 향락이 아니라 빵과 물, 그리고 몇 명의 친구였다. 그가 목표로 삼은 쾌락은 자극의 축적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마음, 그리스어로 아타락시아(ataraxia), 곧 평온이었다. (이 평온의 구조와 그 한계는 앞선 글에서 따로 다뤘다.)
핵심만 추리면 이렇다. 에피쿠로스에게 최고의 쾌락은 강렬한 자극이 아니라 두 가지 없음이다. 몸에 고통이 없는 상태, 그리고 마음에 동요가 없는 상태. 결핍이 메워져 평형에 이른 상태 자체가 정점이다. 목마를 때 마시는 물 한 잔은 달지만, 갈증이 가신 뒤 더 들이부어도 쾌락은 커지지 않는다. 그러니 갈증 없는 상태가 이미 천장이고, 거기서 더 화려한 걸 좇는 건 평온을 깨는 헛수고다.
그래서 그의 처방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다. 그는 욕망을 셋으로 나눴다.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것(음식, 거처, 우정), 자연적이지만 불필요한 것(사치), 그리고 헛되고 공허한 것(명성, 권력, 끝없는 부). 이 중 마지막 부류를 경계하라고 했다. 그것들은 끝이 없어서 영원히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쾌락은 흑자가 아니라 빚 갚기다
여기서 두 사람이 만난다. 표면의 기질은 정반대인데, 쾌락을 보는 눈은 사실상 같다.
쇼펜하우어는 이걸 형이상학으로 못 박았다. 고통만이 적극적(positive)이고, 만족과 쾌락은 소극적(negative)이다. 우리가 느끼는 쾌락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플러스가 아니라 고통이 제거된 자리일 뿐이다. 배고픔(고통)이 있어야 포만(쾌락)이 있고, 결핍이 없으면 채움의 기쁨도 없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고통의 부재”라는 정의가 정확히 같은 말이다. 두 사람 모두 행복을 플러스를 쌓는 일이 아니라 마이너스를 0으로 되돌리는 일로 봤다.
쾌락은 통장 잔고가 아니라 빚을 갚는 순간의 안도감이다. 빚(욕망)을 청산하면 잠깐 후련하지만, 그게 흑자로 남지는 않는다. 그래서 두 철학 모두 같은 곳을 향한다. 새 쾌락을 사냥하지 말고, 빚 자체를 덜 지는 게 남는 장사다. 욕망을 줄이라는 결론이 양쪽에서 똑같이 흘러나온다.
여기까지는 합의다. 진짜 갈림길은 그다음이다. 쇼펜하우어는 그러니 의지를 꺼라라고 한다. 예술적 관조로 잠시 벗어나고, 연민으로 누그러뜨리고, 끝내는 금욕으로 의지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 삶으로부터의 구원이 그의 답이다. 에피쿠로스는 그러니 의지를 길들여라라고 한다. 욕망을 줄여 정원에서 조용히, 그러나 즐겁게 사는 것이 그의 답이다.
한쪽은 출구를 찾고, 한쪽은 정원에 머문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의 어두운 진단을 받아들이면서도 에피쿠로스의 밝은 결론으로 갈 수는 없을까. 그 매듭이 딱 한 군데 있다.
매듭 — 권태와 평온은 같은 자리다
쇼펜하우어의 권태가 정확히 무엇인지 다시 보자. 욕망이 채워지면 의지가 매달릴 대상이 사라진다. 그 의지가 텅 빈 정지 상태가 권태다.
그런데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도 따져보면 똑같은 정지다. 욕망이 잠잠해진, 갈망이 비어버린 상태.
물론 둘이 거기 도달한 경로는 다르다. 쇼펜하우어의 권태는 원하던 걸 손에 넣은 직후에 찾아오고, 에피쿠로스의 평온은 애초에 욕망을 줄여 미리 닿는다. 출발점이 정반대다. 하지만 경로가 어디서 시작됐든, 도착한 자리의 상태는 같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이 향할 대상이 없는 정지. 그러니 권태와 평온의 차이는 그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가 아니다. 둘은 객관적으로 똑같이 비어 있다. 차이는 오직 그 빈자리를 어떻게 읽느냐에서 갈린다.
쇼펜하우어는 그 빈자리를 못 견뎌서 권태라는 고통으로 느꼈고, 에피쿠로스는 같은 빈자리를 고통이 다 사라진 평화로 음미했다. 같은 자리를 두 사람이 정반대로 경험한 셈이다.
일을 다 끝내고 아무 약속도 없는 텅 빈 일요일 오후를 떠올려 보자. 누군가는 그 공백이 못 견디게 허전해서 자꾸 핸드폰을 집어 새 자극을 찾는다. 권태다. 누군가는 같은 공백을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구나 하고 늘어지게 즐긴다. 평온이다. 시간도 상황도 같은데, 그 공백을 다루는 능력만 다르다.
그러니 권태는 음미할 줄 모르는 평온이고, 평온은 받아들인 권태다. 권태가 충족의 필연적 뒷면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진단은 옳다. 다만 그 권태가 반드시 고통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권태는 박멸해야 할 적이 아니라, 아직 음미하는 법을 못 배운 미숙함의 신호에 가깝다. 졸업할 과제이지, 피할 수 없는 형벌이 아니다.
그렇다면 의지는 끄지 말고 길들인다
이 매듭에서 태도 하나가 나온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은 그대로 받되, 그가 내린 결론(의지를 꺼라)만 에피쿠로스 쪽으로 갈아 끼우는 것이다. 의지는 없앨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의 재료다. 끄려고 싸우는 대신 길들인다.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시계추의 진폭을 줄인다. 시계추 운동 자체는 의지의 본성이라 멈출 수 없다. 그러나 진폭은 내가 정한다. 큰 욕망은 큰 결핍과 큰 권태를 낳고, 작은 욕망은 얕게 돈다. 에피쿠로스의 욕망 분류가 정확히 이 진폭 조절 장치다.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것에 행복의 토대를 두면 시계추가 깊이 파이지 않는다. 큰 야망을 전부 버리라는 게 아니다. 무너지면 안 되는 바닥만큼은 작은 순환 위에 두자는 것이다.
둘째, 빈 구간을 음미한다. 시계추가 충족의 끝에 멎는 그 권태의 순간을, 도망치지 말고 평온으로 옮기는 훈련이다. 새 자극으로 권태를 덮는 대신, 그 비어 있음을 ‘지금은 아무것도 결핍되지 않은 상태’로 다시 읽는 연습이다.
가장 좋은 시간은 시계추 바깥에 있다
여기까지만 하면 다소 소극적인 철학이다. 욕망 줄이고 빈자리 견뎌라. 쇼펜하우어의 풍부한 의지 개념을 절반만 쓴 셈이다. 한 걸음 더 나갈 자리가 있다.
쇼펜하우어 자신이 의지에서 벗어나는 능동적인 통로를 하나 뒀다. 예술적 관조, 특히 음악이다. 무언가에 깊이 몰입하면 갈망하는 ‘나’가 잠시 사라지고 대상만 남는다. 결핍도 권태도 아닌 제3의 상태다. 요즘 말로는 몰입(flow)이라 부른다.
그런데 왜 이게 ‘시계추 바깥’일까. 결핍도 권태도 결국 내가 대상과 떨어져 있어서 생긴다. 쫓고 있거나(결핍), 놓쳤거나(권태). 시계추가 좌우로 흔들리는 건 나와 대상 사이에 늘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몰입은 그 거리가 0이 되는 순간이다. 만드는 일에 푹 빠져 있을 때 ‘나’와 ‘하는 일’ 사이의 틈이 사라진다. 밀고 당길 거리가 없으니, 추를 매단 줄 자체가 풀린다. 좌우 어느 끝으로도 가지 않는다. 시계추 운동에서 잠시 빠져나온 것이다.
| 상태 | 의지의 모습 | 느낌 |
|---|---|---|
| 결핍 | 대상을 쫓는 의지 | 고통 |
| 권태 | 대상을 잃은 의지 | 공허 |
| 몰입 | 대상과 하나 된 의지 | 시계추 바깥 |
무언가를 만들고, 깊이 집중하고, 몰두하는 노동이나 놀이. 이건 의지를 끄는 것(쇼펜하우어)도, 욕망을 채우는 것(쾌락 사냥)도 아니다. 의지를 끝없는 사냥에서 빼내어 작고 지속 가능한 순환에 묶어두는 일이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이 바로 그런 장치였다. 친구, 텃밭, 대화처럼 끝나지 않고 잔잔히 도는 활동들. 한 번 채우고 끝나는 욕망이 아니라, 돌보는 동안 계속 돌아가는 순환이다. 그가 명성과 부를 경계하면서도 평생 학파를 세우고 글을 쓰고 제자를 기른 건 모순이 아니다. 밑 빠진 독에서는 발을 뺐지만, 바닥이 보이는 그릇에는 온 힘을 쏟은 것이다.
이 종합의 약한 고리
가장 약한 고리를 숨기지 않는 게 낫겠다. 권태를 평온으로 옮기는 게 정말 가능하냐는 물음이다.
쇼펜하우어라면 이렇게 받아칠 것이다. 그 전환 능력 자체가 의지의 또 다른 위장일 뿐이고, 잠시 평온한 듯해도 의지는 곧 새 대상을 찾아 다시 시계추를 민다고. 빈자리를 음미하겠다는 결심마저 결국 음미하고 싶다는 또 하나의 욕망 아니냐고.
무거운 반박이고, 깔끔하게 논파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가 내놓을 답은 하나뿐이다. 평온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수련이라는 것. 통찰과 습관으로 길러지는 근육이라는 것. 처음엔 텅 빈 일요일 오후가 견디기 힘들지만, 그 공백을 평온으로 읽는 연습을 거듭하면 점점 덜 허전해진다. 증명된 명제라기보다 살아내면서 확인하는 종류의 주장이다.
그래서 이 종합은 정리된 결론이라기보다 걸어볼 만한 내기다. 의지가 실재하고 권태가 충족의 뒷면이라는 어두운 전제를 정면으로 받아들인 사람만 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낙관이다. 공허를 모르는 낙관이 아니라 공허를 통과한 낙관이라서, 오히려 잘 부러지지 않는다.
절벽 위에 정원을 가꾸기
쇼펜하우어와 에피쿠로스는 같은 절벽 앞에 섰다. 욕망은 끝이 없고 채움은 곧 권태로 식는다는 절벽. 쇼펜하우어는 그러니 이 절벽을 아예 떠나자고 했다 — 욕망의 땅에서 발을 빼는 것, 삶으로부터의 구원. 에피쿠로스를 빌리면 다른 답이 가능하다. 떠나는 대신, 그 절벽 위에 정원을 가꾸자고.
의지는 끌 수 없으니 길들인다. 결핍은 진폭을 줄여 다스리고, 권태는 평온으로 음미하고, 그 사이 가장 좋은 시간은 몰입으로 시계추 바깥에 머문다. 비관주의의 형이상학을 끝까지 인정하면서도, 그 결론이 꼭 비관일 필요는 없다. 어두운 진단 위에 세운 밝은 태도가,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고 밝기만 한 태도보다 오래 버틴다.
— tom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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