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만들 때 시간이 사라지고 묘하게 충만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코드를 짜든, 가구를 깎든, 글을 쓰든, 빵을 굽든 상관없다. 이걸 흔히 손재주나 취향, 또는 그저 개인적 성향으로 여긴다. 그러나 만들기를 향한 끌림은 취미보다 훨씬 깊은 데서 온다. 그것은 250만 년에 걸쳐 우리 종에 새겨진 본능이다.

만들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캐물으면 답은 한 겹이 아니다. 진화가 심어둔 보상 회로, 세상에 내 의지가 먹힌다는 심리적 쾌감, 그리고 죽는 존재가 시간에 맞서는 실존적 충동. 세 층위가 포개져 있다. 아래로 한 겹씩 내려가 보자.

도구가 뇌를 만들었다

인간을 부르는 이름 중에 호모 파베르(Homo faber), ‘만드는 인간’이 있다. ‘아는 인간’을 뜻하는 호모 사피엔스와 짝을 이루는 말이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지능의 본질을 앎이 아니라 도구를 만드는 능력에서 찾으며 이 말을 썼고, 그보다 앞서 벤저민 프랭클린은 인간을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라 정의했다. 아는 것보다 만드는 것이 인간의 더 밑바닥 정의일지 모른다는 발상이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도구를 만든 행위 자체가 우리 뇌를 키웠다는 연구가 있다. 약 25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은 돌을 정교하게 쳐내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돌 하나를 제대로 깨려면 어느 각도로 얼마의 힘을 줄지 계획하고, 동작의 순서를 기억하고, 손을 미세하게 조절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정교한 손동작을 관장하는 뇌 영역이 훗날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과 상당 부분 겹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도구 제작 → 뇌 발달 → 언어’가 한 묶음으로 진화했으리라 본다. 더 잘 만드는 개체가 더 잘 살아남았고, 그 성향이 우리 안에 새겨졌다.

이 층위에서 보면,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은 단것을 좋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생존에 유리했던 행동에 뇌가 쾌감이라는 보상을 붙여둔 것이다. 단맛이 칼로리가 풍부하다는 신호였듯, 만들기의 즐거움은 “도구를 만들어라, 그것이 너를 살린다”는 신호였다.

도구가 만든 인간이, 다시 도구를 만든다 손이 도구를만든다 손동작이뇌를 키운다 큰 뇌가 더정교히 만든다
만들기는 한 번 돌고 마는 화살표가 아니라 되먹임 고리다. 손이 도구를 만들면 그 손동작이 뇌를 키우고, 커진 뇌가 더 정교한 도구를 만든다 — 그렇게 만든 도구가 다시 인간을 빚는다.

여기엔 한 번 돌고 마는 화살표가 아니라 되먹임의 고리가 있다. 손이 돌을 깎자 그 손동작이 뇌를 키웠고, 커진 뇌가 더 정교한 도구를 만들었고, 그 도구가 또 뇌와 사회를 바꿨다. 처음엔 우리가 도구를 만든 주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도구가 우리를 빚는 주체가 된다. 불을 다루며 소화기관과 턱이 작아졌고, 문자를 만들며 기억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만들기는 인간의 부수적 능력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을 계속 다시 쓰는 엔진이다.

세상에 내 의지가 먹힌다는 감각

진화가 큰 그림이라면, 매일의 동기 차원에는 더 작고 즉각적인 보상이 있다. 심리학자 로버트 화이트는 이를 **이펙턴스 동기(effectance motivation)**라 불렀다. 인간은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확인하는 데서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아기가 딸랑이를 흔드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영양가도 없고 목적도 없다. 그런데 “내가 흔드니까 소리가 난다”, 즉 세상이 내 의지에 반응한다는 그 피드백이 좋아서 아기는 같은 동작을 끝없이 반복한다. 만들기는 이 감각의 어른 버전이다. 가만두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재료에 내 의도를 새겨 형태로 남기는 일. 이펙턴스 동기는 통제감과 자기효능감의 가장 순수한 형태이고, 만들기는 그 동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채워 준다.

여기에는 만들기만이 주는 이점이 하나 더 있다. 즉각적이고 명확한 피드백이다. 잘 깎였는지 아닌지, 반죽이 부풀었는지 아닌지가 곧바로 눈에 보인다. 이 즉각적 피드백과 분명한 목표는 몰입(flow)이 일어나기 위한 핵심 조건이기도 하다. 만들기가 시간 감각을 지우고 사람을 빨아들이는 활동인 데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내가 만든 것을 더 사랑한다

만들기의 보상은 만드는 동안에만 끝나지 않는다. 다 만든 뒤에도 이어진다. 행동경제학에 **이케아 효과(IKEA effect)**라 이름 붙은 현상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직접 만든 물건에 객관적 가치보다 훨씬 큰 애착을 느낀다. 마이클 노턴과 동료들의 실험에서, 직접 조립한 가구나 직접 접은 종이 상자에 사람들은 완제품에 매길 법한 값보다 더 높은 값을 매겼다. 솜씨가 서툴러 결과물이 삐뚤어도 그랬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만든 것에는 내 수고와 시간이, 다시 말해 나 자신의 일부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세상에 찍힌 내 흔적이다. 우리가 직접 만든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집착이 아니라, 거기에 자신이 묻어 있다는 정확한 감각이다.

죽는 존재가 시간에 저항하는 법

가장 깊은 층위는 실존적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거의 유일한 동물이다. 그래서 “내가 사라져도 남는 무언가”를 만들려는 충동이 깊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이 충동을 인간 활동의 한 축으로 세웠다. 아렌트가 호모 파베르라 부른 것은 베르그송과는 조금 다른 결인데, ‘작업하는 인간’, 곧 만든 이보다 오래 남는 것을 짓는 존재다. 이 인간은 한 번 쓰고 사라지는 것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책상, 집, 도구, 작품처럼 자기보다 오래 살아남는 것들을 짓는다. 그렇게 쌓인 인공물이 ‘세계’라는 안정된 무대를 이루고, 그 위에서 다음 세대가 또 살아간다. 만들기는 유한한 존재가 시간의 흐름에 자국을 남기는 일인 셈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글 한 편, 코드 한 줄, 집 한 채는 모두 같은 문장을 적고 있다. “나는 여기 있었다.” 만들기가 그토록 깊은 만족을 주는 까닭은, 그것이 죽음을 아는 존재가 시간에 맞서는 가장 구체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누군가는 만들기를 싫어할까

여기서 자연스러운 반문이 나온다. 만들기가 정말 본능이라면 모두가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만들기라면 손사래를 치는 사람도 분명 있다.

갈림길은 대개 한 곳에서 생긴다. 만드는 과정이 무엇과 묶여 자랐는가다. 만들기의 즐거움이 평가, 실패에 대한 질책, 결과를 닦달하는 잔소리와 한데 엮여 자란 사람은 그 회로가 눌려 버린다. 만들기 자체가 본능에 없어서가 아니라, 본능 위에 두려움이 덧칠된 것이다. “잘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만드는 게 즐겁다”는 신호를 덮어쓴 상태다. 그래서 만들기를 싫어한다는 말은, 정확히는 만들기를 둘러싼 평가를 싫어한다는 말에 가깝다.

뒤집으면 이렇다. 만들기를 여전히 즐기는 사람은 그 회로가 눌리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다. 만드는 과정과 두려움이 분리된 채로 남았다는 뜻이고, 이건 재능보다 운에 가깝다.

잘 먹여야 할 기질

그러니 이 성향은 고칠 대상이 아니다. 잘 먹이면 되는 기질이다. 좋은 재료, 손을 움직일 시간, 방해받지 않는 몰입. 이것들은 만드는 사람에게 사치가 아니라 영양이다.

진화가 심은 보상 회로 위에, 세상에 의지가 먹힌다는 쾌감과 시간에 저항하려는 욕구가 겹겹이 쌓여 만들기 충동을 이룬다. 그러니 무언가를 만들 때 느끼는 그 끌림은 사소한 취향이 아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온 바로 그 힘이, 250만 년이 지난 지금 내 손끝에서 한 번 더 도는 일이다. 만들 때 가장 살아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가장 인간다운 순간에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 tom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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