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는 흔히 “쾌락주의자”로 분류된다. 영어에서 ‘Epicurean(에피큐리언)‘이 미식가나 향락을 좇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을 만큼, 그 꼬리표는 끈질기다. 그런데 그가 실제로 권한 삶은 진수성찬과 향락이 아니라 빵과 물, 그리고 몇 명의 친구였다. “치즈 한 조각이 있으면 사치스럽게 즐기겠다”고 쓴 사람이다. 그가 목표로 삼은 쾌락은 자극의 축적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 그리스어로 아타락시아(ataraxia), 곧 평온이었다.

이 평온이 어디서 오는지를 따라가 보면 그의 철학은 의외로 깔끔하고 실용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 깔끔함 때문에, 평온이 아닌 것들 — 모험, 열정, 도약 — 앞에서 구조적으로 약해진다. 평온의 정체를 먼저 풀고, 그것이 부서지는 지점까지 가 보자.

평온은 더 얻어서가 아니라 덜 두려워해서 온다

에피쿠로스의 출발점은 좀 의외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불행한 건 욕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두려움과 헛된 욕망에 시달려서다. 그래서 처방도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다. 평온은 무언가를 더 채워 넣어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마음을 휘젓는 것들을 걷어냈을 때 남는 상태다.

후대가 그의 처방을 네 줄로 압축한 게 테트라파르마콘(tetrapharmakos), 직역하면 “네 겹 치료약”이다. 마음을 짓누르는 네 가지를 차례차례 처방한다.

첫째, 신에 대한 두려움. 신은 완전히 행복한 존재라 인간사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 천둥은 누군가의 분노가 아니라 그저 원자의 운동이다. 에피쿠로스가 원자론이라는 물리학에 그토록 공을 들인 건 학문적 취미가 아니라 평온의 도구였다. 세상이 변덕스러운 신이 아니라 법칙으로 굴러간다는 걸 알아야, 벼락과 재앙을 신의 처벌로 읽는 미신적 공포에서 풀려나기 때문이다.

둘째,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의 가장 유명한 논증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없고, 죽음이 오면 나는 이미 없다.” 우리가 끝내 겪을 수조차 없는 일을 미리 겁내는 건, 애초에 번지수가 틀린 두려움이다.

셋째, 고통에 대한 두려움. 격심한 고통은 대개 짧고, 오래 가는 고통은 견딜 만한 수준이다. 고통의 강도와 지속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으니, 막연한 공포만큼 무섭진 않다는 위안이다.

넷째, 좋은 것을 얻지 못할 두려움. 정작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은 사실 구하기 쉽다. 이 네 번째가 쾌락에 대한 그의 재정의로 이어진다.

네 약을 관통하는 논리는 하나다. 두려움의 정체를 정확히 알면 두려움이 풀린다. (셋째, 고통에 대한 약만 결이 조금 다르다. 정체를 몰라서가 아니라 막연히 부풀려서 무서운 것이니, 실제 크기를 가늠해 바람을 빼는 쪽이다.) 거의 현대 인지치료의 원형 같은 발상이다. 평온은 의지로 짜내는 게 아니라,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으면 부산물로 따라온다.

쾌락은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여기가 그가 가장 오해받는 지점이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강렬한 자극이 아니라 두 가지 없음이다. 몸에 고통이 없는 상태(아포니아), 그리고 마음에 동요가 없는 상태(아타락시아). 결핍이 메워져 평형에 이른 상태 그 자체가 최고의 쾌락이다.

목이 마를 때 마시는 물 한 잔을 떠올려 보자. 그 한 잔은 강렬하게 달다. 그런데 갈증이 가신 뒤에 물을 더 들이부어도 쾌락이 더 커지진 않는다. 오히려 속이 더부룩해진다. 그러니 “갈증이 없는 상태”가 이미 정점이고, 거기서 더 화려한 음료를 좇는 건 평온을 깨는 헛수고다.

이 기준으로 그는 욕망을 셋으로 나눴다.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것(음식, 거처, 안전, 우정)은 채워라 — 쉽다. 자연적이지만 불필요한 것(진수성찬, 호화로운 집)은 있으면 즐기되 매달리지 마라. 그리고 헛되고 공허한 것(명성, 권력, 끝없는 부)은 경계하라. 끝이 없어 영원히 충족되지 않고, 그래서 평온을 영구히 깨뜨리기 때문이다.

평온을 떠받치는 두 기둥, 우정과 은둔

평온이 마음의 작업만으로 유지되는 건 아니다. 에피쿠로스는 두 가지 외부 조건을 강조했다.

하나는 우정이다. 그는 “지혜가 평생의 행복을 위해 마련하는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아테네에 “정원(Kēpos)“이라는 공동체를 세워 친구들과 단순하게 사는 실험을 했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여성과 노예까지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았다.

다른 하나는 은둔이다. “λάθε βιώσας(라테 비오사스) — 드러나지 않게 살라.” 정치와 명성의 경쟁에서 빠지는 것이 평온의 조건이라고 봤다. 경쟁 트랙에 올라타는 순간, 내 마음의 평형은 남의 평가와 승패에 인질로 잡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처방전이다. 두려움을 해체하고, 욕망을 한정하고, 우정 안에서 조용히 산다. 실제로 마음이 가벼워지는 길이다. 그런데 이 처방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다.

그런데 이 평온은 ‘방어적 행복’이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행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전부 빼기로 이뤄져 있다. 고통이 없는 상태, 동요가 없는 상태, 두려움이 없는 상태, 욕망을 줄인 상태. 하나같이 무언가에서 벗어나는 자유이지,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자유가 아니다.

이건 항구에 정박한 배의 행복이다. 파도도 없고 침몰 위험도 없다. 안전하다. 그런데 배는 본래 바다로 나가라고 만들어진 물건이다. 에피쿠로스는 “난파당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는데, 누군가는 “항구에 묶인 배가 무슨 배냐”고 되물을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이 원하는 것 중 상당수가 동요를 전제한다는 데 있다. 무언가를 격렬히 원한다는 건, 그것이 없을 때 고통받겠다는 계약을 맺는 일이다. 사랑도, 야망도, 창작 충동도 “이걸 이루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불안을 동반한다. 모험은 한술 더 떠서, 자발적으로 고통의 가능성에 자기를 노출시키는 행위다. 산을 오르는 사람은 고통의 부재를 위해 오르는 게 아니라 그 긴장과 정복의 강렬함 자체를 위해 오른다. 아타락시아의 잣대로 보면 이 모든 게 평형을 깨는 리스크다.

니체는 왜 등을 돌렸나

이 약점을 가장 날카롭게 찌른 사람이 니체다. 그는 한때 에피쿠로스를 깊이 흠모했지만, 자기 철학이 무르익으면서 등을 돌렸다. 니체가 보기에 에피쿠로스의 평온은 힘이 넘쳐 도달한 고요가 아니라 지쳐서 가라앉은 상태에 가까웠다. 이런 행복이란 끊임없이 고통받아 본 사람만이 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 그는 꼬집었다. 위대한 것을 더 이상 욕망할 힘이 남지 않은 사람이, 욕망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구조 아니냐는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인간을 움직이는 진짜 동력은 평온이 아니라, 자기를 끌어올려 한계 너머로 밀고 나가려는 힘이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바로 그 충동을 “헛된 욕망”으로 분류해 솎아낸다. 평온을 얻는 대가로 강렬하게 살 가능성 자체를 반납하는 셈이다. 그래서 철저한 에피쿠로스주의자는 깊은 사랑에 빠지거나, 모든 걸 건 창업을 하거나, 세상을 바꾸려 뛰어들기 어렵다. 그건 전부 평온을 담보로 잡히는 베팅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가 막은 건 ‘맹목적’ 열정이었다

그렇다고 에피쿠로스를 열정의 적으로만 몰면 그를 너무 좁게 읽은 것이다. 그의 철학에는 프로네시스(phronesis)라는 또 하나의 축이 있다. 흔히 실천적 지혜나 분별로 옮기는 말인데, 풀어 말하면 앞뒤를 따져보는 능력이다. 눈앞의 쾌락과 고통을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그것이 나중에 무엇을 데려올지까지 셈해서 고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셈법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어떤 고통은 더 큰 쾌락으로 돌아오니 기꺼이 견디고, 어떤 쾌락은 더 큰 고통을 끌고 오니 마다하라. 쓴 약은 삼키고 달콤한 독은 멀리하는 셈이다. 운동의 고됨, 절제의 불편함,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괴로움은 그가 오히려 권한 고통이었다. 반대로 과음의 짜릿함이나 사치의 만족은 뒤따라오는 숙취와 공허 때문에 그가 말린 쾌락이었다. 그러니 그는 고통을 무조건 피하라고 한 게 아니라, 치를 값이 맞는 고통이라면 치르라고 한 셈이다.

이 잣대를 대면 그가 진짜로 경계한 대상이 또렷해진다. 그는 열정 자체가 아니라 맹목적인 열정을, 더 정확히는 끝이 없어 영원히 갈증만 키우는 욕망을 경계했다. 명성과 권력과 한도 없는 부가 그랬다. 아무리 채워도 “조금만 더”가 따라붙으니, 거기에 마음을 걸면 평생 평온에 닿지 못한다. 반면 끝이 분명한 도전, 치를 대가를 알고 들어가는 모험이라면 그의 셈법 안에서도 얼마든지 정당화된다. 그가 막은 건 밑 빠진 독이지, 바닥이 보이는 그릇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자신이 무기력하게 숨어 산 사람도 아니었다. 학파를 세우고, 방대한 글을 쓰고, 제자들을 길렀다. “정원”이라는 공동체를 일군 것부터가 평생을 건 능동적인 기획이었다. 그러니 그의 은둔은 아무것도 안 하는 도피가 아니라, 어디에 힘을 쏟을지를 가려낸 선택에 가깝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거대한 판 — 정치, 명성, 군중의 평가 — 에서는 발을 빼되, 자기가 직접 가꿀 수 있는 작은 마당에는 온 힘을 다 쏟은 것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끝내 남는다. 바로 그 프로네시스, 늘 손익을 따져보고 남는 게 있을 때 움직이는 태도는, 이미 따지기를 멈추고 몸부터 던지는 종류의 열정과는 체질이 다르다. 누군가에게 깊이 빠져드는 순간이나 무모해 보이는 일에 인생을 거는 순간에는, 손익을 적어 내려가는 장부가 끼어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그 장부를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를 지켜준 힘인 동시에, 그가 닿지 못한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는 질문, 평온인가 충만인가

결국 이 철학은 우리를 갈림길 앞에 세운다. 좋은 삶이란 평온한 삶인가, 충만한 삶인가. 이 둘은 자주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한쪽 끝에는 에피쿠로스와, 세상일에 초연함으로 같은 평온을 노린 또 다른 고대 학파 스토아가 있다. 둘은 방법이 정반대지만 — 에피쿠로스는 세상에서 물러나서, 스토아는 세상 한복판에 뛰어들되 통제 불가능한 것에 무심해져서 — 똑같이 흔들리지 않음을 목표로 삼는다. 다른 쪽 끝에는 니체와 낭만주의가 있다. 이들에게 삶의 척도는 평온이 아니라 강도다. 얼마나 격렬하게 살았는가.

에피쿠로스의 평온이 열정 앞에서 흔들려 보이는 건, 그의 철학이 틀려서가 아니라 애초에 재고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흔들림의 총량을 줄이는 법을 가르칠 뿐, 흔들림의 깊이를 키우는 법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 그의 처방을 받아들이기 전에 스스로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다. 나는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한번 제대로 흔들려 보기를 바라는가.

두려움을 풀어내는 그의 처방은 거의 누구에게나 듣는다. 다만 그 약을 어디까지 받아 들지는 사람마다 갈린다. 잔잔한 물에 닻을 내리고 싶은 사람이 있고, 부서질 걸 알면서도 먼바다로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 에피쿠로스는 앞쪽 사람을 위한 길잡이다. 뒤쪽이라면, 그의 약은 절반만 받아 들면 된다.

— tom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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