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어느 금요일 저녁이었다. 미국 밖에서 어떤 AI 모델을 쓰던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어제까지 멀쩡히 답하던 모델이 갑자기 멈춘 것이다. 장애도 아니고 점검도 아니었다. 미국 정부가 그 회사에 명령을 내렸고, 회사는 그날로 모델을 내렸다.
문제가 된 모델은 앤트로픽(Anthropic)의 최상위 모델인 페이블 5(Fable 5)와 미토스 5(Mythos 5)였다. 클로드(Claude)를 만드는 그 회사이며, 두 모델은 클로드 제품군 위에 놓인 가장 강력한 라인이었다. 정부는 그중 페이블 5의 안전장치를 우회하면 강력한 사이버 공격 능력이 풀릴 수 있다고 봤고, 국가안보를 이유로 수출통제 권한을 발동했다. 명령의 범위가 특이했다. 특정 국가가 아니라 국적이 기준이었다. 미국 밖에 있든 안에 있든, 외국인이면 못 쓴다. 회사의 외국인 직원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국적별로 골라 차단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자, 회사는 미국 시민까지 포함해 전 사용자에게 두 모델을 그냥 꺼버렸다.
회사는 이 조치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문제의 우회는 특정 코드를 읽고 결함을 고쳐달라고 요청하는 좁은 사례 하나에만 통하는 것이고, 경쟁사 모델도 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주장이었다. 수억 명이 쓰는 상용 모델을 그 정도 이유로 회수하는 건 과하다고도 했다. 반박이 옳든 그르든, 사용자 입장에서 확인된 사실은 하나였다. 내가 쓰던 모델의 전원 스위치가 워싱턴에 있었다는 것.
모델은 소유물이 아니라 수도꼭지였다
칩을 사면 그건 내 것이 된다. 수출이 막혀도 이미 산 물건은 내 창고에 남는다. 모델은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은 모델을 사서 가지는 게 아니라, 남의 서버에 접속해 빌려 쓴다. 평소엔 틀면 물이 나오니 내 것 같지만, 잠그는 손잡이는 공급자가 쥐고 있다.
그동안 많은 나라와 기업이 이 사실을 굳이 따지지 않았다. 성능 좋고 값싼 미국 모델을 쓰면 그만이지, 뭐하러 직접 만드냐는 쪽이었다. 자체 개발은 비용과 실용성의 문제로만 보였다. 이번 사건이 그 계산을 바꿨다. 모델 접근이 안보의 문제로 올라선 것이다. 핵심 인프라를 외국 정부의 판단 하나에 맡겨두면, 그 나라가 마음먹는 날 우리 산업이 멈춘다.
이런 깨달음을 가리키는 말이 소버린 AI(sovereign AI), 우리말로 AI 주권이다. 새 개념은 아니다. 유럽과 중국과 걸프는 이미 몇 년째 자기 모델과 인프라를 키워 왔다. 이번 사건은 그 흐름에 없던 동기를 만든 게 아니라, 미뤄 둔 사람들에게 명분을 쥐여 준 쪽에 가깝다.
주권에도 층이 있다
“우리도 AI를 직접 한다”는 말은 뭉뚱그리면 안 된다. 무엇을 직접 쥐느냐에 따라 주권은 세 층으로 갈린다.
맨 위는 데이터 주권이다. 우리 국민의 데이터가 국경 밖 서버로 넘어가지 않게 하는 일이다. 자국에 데이터센터를 두고 거기서 처리하면 되니 상대적으로 손에 잡힌다.
가운데는 모델 주권이다. 우리가 통제하는 모델 가중치를 가졌느냐를 묻는다. 처음부터 자체 개발하는 길이 정공법이지만, 가중치가 공개된 오픈웨이트 모델을 받아 자국 데이터로 다듬는 우회로도 있다. 그래서 중간 난이도다.
맨 아래는 컴퓨트 주권이다. 그 모델을 돌릴 칩이 우리 손에 있느냐는 질문이고, 셋 중 가장 어렵다. 모델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걸 학습시키고 추론할 고성능 GPU가 없으면 무용지물인데, 그 GPU의 절대다수가 미국 회사(엔비디아)에서 나오고 역시 수출통제 품목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설이 보인다. 모델 주권을 추구할수록 컴퓨트 주권 문제에 부딪힌다. 미국이 칩 통제에서 모델 통제로 손을 뻗은 까닭도 이 지점에 있다. 위층을 아무리 단단히 지켜도 맨 아래 토대가 남의 것이면, 주권은 끝내 반쪽이다.
토대를 쥔 손
컴퓨트가 진짜 병목이라는 건 돈 많은 나라들의 행보에서 가장 또렷하게 드러난다.
걸프의 두 나라가 대표적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국부펀드의 자금을 AI 인프라에 쏟아붓고 있다. 사우디는 국가 AI 기업을 세워 엔비디아와 대규모 GPU 공급 계약을 맺었고, 아랍에미리트도 거대한 컴퓨트 클러스터를 짓는다. 그런데 이 계획의 결정적 단추가 외부에 있다. 2025년 말, 미국 상무부가 두 나라로 가는 엔비디아 최신 칩 수출을 승인하고 나서야 한동안 막혀 있던 거래가 풀렸다. 돈은 있어도 칩을 들일지 말지는 미국이 정한다는 구도가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중국은 정반대 자리에 있다. 애초에 미국이 첨단 칩을 막아버려서, 자립이 선택이 아니라 강제가 됐다. 그 결과 가장 통합된 자체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화웨이가 자체 AI 칩을 만들고, 딥시크(DeepSeek)와 알리바바의 큐원(Qwen) 같은 모델이 그 위에서 돌고, 국가 클라우드가 배포를 맡는다. 다만 자립에도 천장이 있다. 칩을 설계해도 그걸 대량으로 찍어낼 제조 장비 역시 미국이 통제하는 품목이라, 중국은 스스로 만든 수요조차 다 채우지 못하는 형편이다.
유럽은 또 다른 길을 간다. 프랑스의 미스트랄(Mistral)을 사실상 유럽 대표 선수로 키우면서, 여러 나라가 “디지털 주권”을 내걸고 자체 인프라에 공적 자금을 붙이고 있다. 미스트랄은 대규모 투자를 받아 파리 인근에 데이터센터를 짓는데, 거기 들어갈 칩 역시 엔비디아에서 산다. 유럽도, 걸프도, 중국도 출발점과 전략은 제각각이지만, 칩이라는 한 지점에서 같은 벽을 만난다.
한국의 ‘국가대표 AI’
한국도 이 판에 들어와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 별명으로 ‘국가대표 AI’라 불리는 프로젝트다. 글로벌 최고 모델 대비 95% 수준의 성능을 자력으로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2027년까지 수천억 원 규모의 예산과 GPU·데이터·인력을 지원한다. 이름 그대로, 성능만 보는 게 아니라 “얼마나 스스로 만들었나”, 곧 독자성을 함께 따진다는 점이 이 사업의 핵심이다.
방식이 독특하다. 한 곳을 정해 밀어주는 게 아니라, 여러 팀을 붙여 6개월마다 평가해 떨어뜨리는 서바이벌이다. 2025년 8월 네이버클라우드·LG AI연구원·SK텔레콤·업스테이지·NC AI 다섯 팀으로 출발했는데, 약 다섯 달 뒤 첫 평가에서 이변이 나왔다. 국내 최강으로 꼽히던 네이버클라우드가 탈락한 것이다. 점수는 상위권이었지만, 남이 만든 모델에 기댄 부분이 있어 독자성 기준을 채우지 못했다는 평가였다(NC AI도 함께 탈락했다). 살아남은 LG·SKT·업스테이지에 추가 공모로 한 팀을 더 채워, 현재는 네 팀이 다음 평가를 앞두고 경쟁한다.
흥미로운 건 추가로 합류한 팀이다. 모티프테크놀로지스라는 곳으로, AI 인프라 소프트웨어 회사 모레(Moreh)에서 갈라져 나왔다. 모레는 본래 특정 칩에 종속되지 않고 여러 종류의 GPU에서 모델이 잘 돌아가게 다듬는 최적화를 본업으로 하던 회사다. 그 내공을 업고 모티프는 비교적 적은 GPU와 짧은 시간으로 작은 모델을 만들었고, 그 모델이 일부 추론 성능에서 덩치 큰 모델들을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네이버가 독자성에서 걸려 떨어진 그 자리에, “처음부터 직접 설계했다”를 정면으로 내세운 팀이 들어온 구도다.
이 사업의 밑바탕에도 컴퓨트 문제가 깔려 있다. 정부는 추경으로 엔비디아 첨단 GPU 1만여 장을 따로 사들여, 이 사업을 비롯한 국가 AI 프로젝트에 나눠 댄다. 모델을 직접 만들겠다는 결심이 곧장 “그럼 칩은 어디서 구하나”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사업의 구조 자체가 보여준다.
끊길 수 없는 모델
이번 사건이 조용히 부각시킨 승자가 하나 있다. 가중치가 공개된 오픈웨이트 모델이다.
API로 빌려 쓰는 모델은 공급자가 잠그면 끝이지만, 한 번 내려받은 가중치는 누가 회수해 가지 못한다. 미국이 스위치를 내려도 내 서버 안의 모델은 계속 돈다. 메타의 라마(Llama), 프랑스의 미스트랄, 중국의 딥시크와 큐원 같은 모델이 여기에 해당한다. 자국 데이터센터에 격리해 돌릴 수 있으니, 쓰는 쪽은 데이터 주권과 모델 주권을 한 번에 어느 정도 챙길 수 있다. 완전한 자체 개발이 버거운 나라가 가장 먼저 택하는 것도, 이렇게 오픈웨이트를 받아 자국 데이터로 다듬는 방식이다.
물론 공짜 점심은 아니다. 가장 앞선 오픈웨이트 상당수가 중국발이라, 데이터가 어떻게 다뤄지는지를 따지는 조직은 출신을 함께 저울질한다. “자기 서버에 격리하니 데이터는 안 나간다”는 장점과 “그래도 출신이 불안하다”는 경계가 같이 따라붙는다. 한국이 굳이 큰돈을 들여 독자 모델을 만들려는 배경에도, 남의 모델에 의존하는 데 대한 이런 이중의 불편함이 있다.
그래서 무엇이 남나
소버린 AI 붐을 두고 “이제 다들 자기 모델을 갖게 된다”고 정리하면 절반만 맞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가장 큰 제약은 역시 컴퓨트다. 거의 모든 진영이 같은 엔비디아 칩으로 수렴한다. 돈으로 사려는 걸프도, 국책으로 미는 한국도, 자립을 강제당한 중국도 결국 칩 앞에서 멈칫한다. 프런티어 격차도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자국 모델을 만든다고 해서 세계 최고 모델이 바로 나오는 게 아니고, “쓸 만한 국산”과 “최첨단” 사이에는 한두 세대의 거리가 남는다.
미국 쪽에도 부메랑이 있다. 통제를 세게 걸수록 동맹국까지 자립과 다극화로 떠밀려, 길게 보면 미국 모델의 세계 점유율을 스스로 깎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반도체에서 중국이 걸어간 길이 그랬다.
그래서 가장 그럴듯한 그림은 모두가 완전 자립하는 미래가 아니다. 중국처럼 전면 자립으로 가는 쪽은 소수일 것이고, 대다수는 섞어 쓰는 헤징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미국 프런티어 모델을 쓰되 한 곳에만 묶이지 않고, 오픈웨이트를 자국 데이터센터에 깔아 비상용으로 두고, 국책 모델을 키워 규제산업의 안전판으로 삼는 식이다. 핵심은 “어느 모델이 제일 좋은가”에서 “어느 모델이 갑자기 사라져도 우리 서비스는 도는가”로 질문이 바뀌었다는 데 있다.
그 금요일 저녁, 화면 앞에서 멈춘 모델을 바라본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다음에 또 이러면, 나는 무엇으로 갈아탈 수 있나. 각국 정부가 지금 수천억을 들여 답하려는 질문도, 규모만 다를 뿐 정확히 같은 질문이다.
— tom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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