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AI 에이전트한테 일을 많이 맡긴다. 코드를 짜고, 자료를 찾고, 초안을 쓰는 일을 시키면 빠르고 곧잘 해낸다. 분명 전보다 훨씬 많은 일을 처리하게 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상한 걸 깨달았다. 처리량은 늘었는데, 내 사고의 폭은 조금도 넓어지지 않았다.
장면 하나. 에이전트에게 까다로운 버그를 맡겼더니 몇 분 만에 고쳐서 돌려준다. 코드는 멀쩡히 돌아간다. 그런데 “왜 그게 문제였고 왜 이 수정이 맞느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결과물은 내 손에 있는데 그걸 떠받치는 이해는 내 머리에 없다. 일은 끝났는데, 정작 그 일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장면 둘. 발표를 앞두고 자료 조사를 통째로 맡긴 적이 있다. 잘 정리된 문서가 돌아왔고, 그대로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발표는 매끄러웠다. 누군가 “그 수치, 두 해 전이랑 비교하면 어떻게 되나요”라고 묻기 전까지는. 딱 한 겹만 파고드는 질문에 나는 멈췄다. 표면은 완벽하게 갖췄는데 그 아래가 비어 있었다.
두 장면에서 위임된 것과 위임되지 않은 것의 경계가 보인다. 위임된 건 생각의 실행이다. 정보를 모으고, 코드를 쓰고, 문장을 뽑아내는 노동. 위임되지 않은 건 그 일을 떠받치는 이해다.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정의하고, 여러 길 중 왜 이 길인지 판단하고, 끝내 책임지고 결정하는 일. 앞쪽은 남에게 넘겨도 결과가 나온다. 뒤쪽은 넘기는 순간 내 안에서 그냥 비어버린다.
왜 한쪽만 비는 걸까. 실행은 결과물로 남지만, 이해는 과정에서만 생기기 때문이다. 버그를 직접 들여다보며 막다른 길을 몇 번 만나고, 가설을 세웠다 틀리고, 그제야 “아, 이거였구나” 하는 순간, 이해는 그 시행착오가 가라앉은 찌꺼기다. 남이 대신 헤맨 길은 결론만 깔끔하게 건너온다. 헤맨 길 자체는 건너오지 않는다. 그래서 답은 손에 쥐어도, 그 답을 낳은 이해는 여전히 내 바깥에 있다.
여기서 당연한 반박이 나온다. 그럼 모든 걸 직접 이해해야 하나? 우리는 컴파일러가 어떻게 도는지, 전기가 왜 흐르는지 몰라도 잘만 쓰는데.
맞다. 그런데 그건 다른 종류의 모름이다. 컴파일러는 검증되고 안정된 토대다. 수많은 사람이 그 아래를 따져봤고, 틀리면 금방 드러난다. 우리는 그 단단한 층을 딛고 그 위에 내 이해를 쌓는다. 추상화란 믿을 만한 바닥을 밟고 한 층 더 올라서는 일이다.
위임이 위험해지는 건 방향이 반대일 때다. 내가 딛고 설 바닥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바로 그 층을 비울 때. 발표에서 막힌 그 수치는 내가 밟고 설 토대가 아니라 내가 설명했어야 할 내용이었다. 추상화는 이해를 토대에 맡기고 그 위에 더 쌓는 것이고, 위임은 이해가 있어야 할 자리를 통째로 내주는 것이다. 겉보기엔 똑같이 “남에게 맡긴다”지만, 하나는 올라서고 하나는 꺼진다.
이 경계를 두 사람이 100년을 사이에 두고 똑같이 짚었다.
“You can outsource your thinking, but you can’t outsource your understanding.” — 딥러닝 연구자 안드레이 카르파시가 즐겨 인용해 퍼뜨린, 출처 불명의 한 문장
“지식은 전할 수 있어도, 지혜는 전할 수 없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1922)
카르파시가 말한 ‘생각의 실행’과 헤세가 말한 ‘지식’은 결이 같다. 둘 다 남에게 건네지는 것이다. 작업으로든 문장으로든 옮길 수 있다. 반대로 ‘이해’와 ‘지혜’는 건네지지 않는다. 직접 겪고 따져본 사람의 안에서만 자란다. 강 건너는 법을 백 번 들어도, 직접 물살을 받아본 사람의 그 감각만은 건네받을 수 없다. 『싯다르타』가 끝내 강가에서,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이야기인 건 우연이 아니다.
100년 사이에 달라진 건 하나다. 건넬 수 있는 표면, 곧 생각의 실행이 비교할 수 없이 쉽고 싸졌다. 헤세의 시대에 지식을 옮기려면 책과 스승이 필요했고, 얼마 전만 해도 코드 한 줄은 사람이 직접 짰다. 지금은 그 표면을 통째로 에이전트에 떠넘길 수 있다. 그래서 착각하기 쉽다. 표면이 이렇게 쉬워졌으니 깊이도 따라왔겠거니. 하지만 건너지지 않는 것은 도구가 바뀌어도 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표면이 쉬워질수록, 그것만 손에 쥔 채 깊이는 비워두고 일이 끝나버리기 쉽다.
그래서 요즘은 일을 넘기기 전에 한 번 멈춘다. 이 일에서 문제를 정의하고, 길을 고르고, 결정하는 자리, 거기에 내가 있는가, 아니면 결과만 받아 들고 이해는 비워둘 셈인가. 답이 께름칙하면, 느리더라도 에이전트와 함께 한 단계씩 같이 따져 나간다. 속도를 조금 내주고 이해를 내 쪽에 남기는 거래다.
도구는 표면을 나른다. 강은, 여전히 내가 건넌다.
— tom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