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여 년 전, 드니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세상의 모든 기술을 한 권에 담겠다는 무모한 책을 만들었다. 『백과전서』다. 거기엔 철학과 과학만 있는 게 아니라, 대장간의 망치와 방직기의 톱니바퀴를 분해해 그린 수천 장의 도판이 함께 실렸다. 위쪽 칸엔 사람이 도구를 쥐고 일하는 작업장이, 아래쪽 칸엔 그 도구를 부품 단위로 떼어 본 그림이 놓인다. 디드로에게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인간이 무엇을 만들고 어떤 도구로 만드는지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도구는 인간 정신 바깥에 따로 붙은 부속물이 아니라, 정신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 그 자체였다.
노션(Notion)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이야기하려면 이 자리에서 출발하는 편이 낫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노션은 ‘메모도 되고 위키도 되고 할 일 관리도 되는, 좀 예쁜 올인원 앱’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창업자가 만들려던 물건은 그게 아니었다. 그가 만들려던 건 또 하나의 편리한 앱이 아니었다. 디드로가 도판으로 하려던 일에 가까운 무언가, 곧 사람이 자기 생각을 다루는 도구 자체를 바꾸는 일이었다. 이 야심이 어디서 왔고 어쩌다 모순을 떠안게 됐는지 따라가 보자.
도구가 우리를 빚는다
출발점은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이다. 1960년대에 그는 우리가 보통 거꾸로 본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은 어떤 매체로 무슨 내용을 전하느냐에 주목하지만, 정작 사람을 더 깊이 바꾸는 건 매체 그 자체라는 것이다. 같은 소식도 책으로 읽을 때와 텔레비전으로 볼 때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릇이 음식 맛을 바꾸듯, 매체가 사고의 형태를 바꾼다. 그것이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라는 유명한 문장의 뜻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 문장이 노션의 정신적 출발점이 됐다. 매클루언의 동료 존 컬킨이 그의 생각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말이다.
손에 쥔 도구가 달라지면 할 수 있는 생각의 종류가 달라진다. 종이에 적는 사람과 스프레드시트에 적는 사람은 같은 문제도 다르게 본다. 그러면 ‘더 나은 도구를 만드는 일’은 그대로 사람이 더 잘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 도구를 빚는 것이 곧 사고를 빚는 것이라는 이 등식이 노션이 자기 일을 이해하는 방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소프트웨어를 기능의 묶음이 아니라 사고의 매체로 본다는 뜻이다.
잊힌 약속
매클루언이 전제를 깔았다면, 그 전제를 컴퓨터에 처음 적용한 사람들이 따로 있다. 노션이 자기 족보로 삼는 두 인물이다.
더글러스 엥겔바트. 흔히 ‘컴퓨터 마우스를 발명한 사람’으로 기억되지만, 그건 곁가지다. 그의 진짜 평생 과제는 인간 지능의 증강(augmenting human intellect) 이었다. 컴퓨터가 방 하나를 채우는 거대한 계산기로만 여겨지던 1960년대에, 그는 컴퓨터를 사람이 복잡한 문제를 더 잘 생각하도록 돕는 매체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8년의 한 시연에서 그는 마우스, 하이퍼링크, 실시간 공동 편집, 화상 연결, 창(window) 인터페이스를 한자리에서 선보였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컴퓨터 화면의 거의 모든 원형이 이 데모 하나에 들어 있었다. 나중에 노션의 창업자는 엥겔바트를 회사의 “수호성인”이라 불렀다.
앨런 케이. 엥겔바트의 비전을 ‘모든 사람, 특히 아이들의 손’으로 옮기려 한 사람이다. 1972년 그는 아이도 들고 다니며 배우고 만드는 개인용 휴대 컴퓨터 ‘다이나북’을 구상했다. 노트북과 태블릿을 40년 앞서 그린 셈이다. 그가 만든 프로그래밍 환경 스몰토크는 오늘날의 그래픽 인터페이스와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의 뿌리가 됐다. 케이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이렇다. 컴퓨터는 정해진 기능을 소비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용자가 자기 도구를 직접 빚어내는 말랑말랑한 재료여야 한다.
세 사람을 잇는 선은 분명하다. 도구가 사고를 빚는다는 전제(매클루언), 그러니 컴퓨터로 그 사고를 증강하자는 목표(엥겔바트), 그러려면 소프트웨어를 딱딱한 플라스틱이 아니라 말랑한 레고로 만들자는 방법(케이). 이들의 공통된 안타까움은, 산업이 이 약속을 배신했다는 데 있다. 우리가 매일 쓰는 소프트웨어 대부분은 회사가 정해 준 칸막이 안에서 정해진 동작만 하는 ‘완성된 제품’이 됐다. 컴퓨터는 창작의 매체가 아니라 소비의 단말기로 굳었다. 노션의 서사는 여기서 시작한다. 실리콘밸리가 잊어버린 그 약속의 상속자를 자처하는 것이다.
노션의 답: 도구를 만드는 도구
그래서 노션은 메모 전용 앱, 위키 전용 앱, 데이터베이스 전용 앱을 각각 더 잘 만드는 경쟁에 끼지 않았다. 대신 창업자 아이반 자오와 공동창업자 사이먼 라스트는 레고 블록 같은 기본 단위를 주기로 했다. 텍스트 한 줄, 이미지, 표, 강조 박스(콜아웃), 다른 자료를 끌어와 박는 임베드. 이 단위들을 사용자가 직접 조립해 자기 문제에 맞는 도구를 스스로 짓게 하는 것이다.
핵심은 단순하지만 강력한 한 가지 원칙에 있다. 모든 것이 블록이고, 블록은 어떤 타입이든 될 수 있고, 블록은 서로 중첩된다. 제목도 블록, 표도 블록, 표 안의 행도 블록, 페이지조차 블록이다. 그리고 블록은 블록을 품을 수 있다. 데이터베이스가 페이지 안에 들어가고, 그 페이지가 다시 목록 안에 들어간다.
자오는 이 설계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모든 게 블록이고 블록을 중첩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은 기능(feature)이 아니라 언어다. 기능을 하나씩 구현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든 조합해 지을 수 있는 원초적 단위(primitive)를 만든 것이다. 기능은 그 단위들의 조합에서 저절로 나온다. 레고 회사가 ‘집 장난감’과 ‘자동차 장난감’을 따로 팔지 않고 같은 블록을 파는 것과 같다. 집을 지을지 우주선을 지을지는 블록을 쥔 사람이 정한다.
이것이 ‘도구를 만드는 도구’라는 말의 정확한 뜻이다. 노션은 완성된 도구를 파는 게 아니라, 도구를 지을 수 있는 재료를 판다. 매클루언에서 케이로 이어진 이상이 제품의 형태로 번역된 자리가 바로 여기다.
교토에서 다시 쓰다
이상이 곧장 제품이 된 건 아니다. 노션은 한 번 거의 죽었다.
2013년에 자오와 라스트는 회사를 세우고 엔젤 투자를 받았다. 비전은 처음부터 ‘소프트웨어 레고’였다. 그러나 첫 버전은 야심만 컸다. 당시 검증되지 않은 구글의 실험적 웹 기술에 기댄 탓에 제품은 수시로 멈췄고, 확장도 되지 않았다. 더 뼈아픈 문제는 따로 있었다. 첫 노션은 대놓고 ‘코딩 없이 누구나 프로그램을 만드는 앱’을 표방했는데, 사람들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았다. 도구를 직접 만들고 싶다는 욕구 자체가 대중에겐 없었던 것이다.
2015년, 투자금은 바닥나고 회사는 파산 직전이었다. 두 사람은 작은 팀을 정리하고 단둘이 일본 교토로 거처를 옮겼다. 미닫이 한 장으로 침실이 나뉘는 작은 집에서, 씻지도 요리하지도 않고 하루 18시간씩 노션을 처음부터 다시 썼다. 실리콘밸리의 소음에서 벗어나 생활비를 극단적으로 낮춘 이 시기에, 불안정한 토대를 걷어내고 지금의 블록 엔진을 새로 깔았다.
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이때 얻은 깨달음이었다. 큰 소프트웨어가 되려면, 이미 모두가 아는 익숙한 물건에서 출발하고 도구를 만드는 능력은 숨겨야 한다는 것. 자오는 이걸 “브로콜리에 설탕을 입힌다”고 표현했다. 영양가 있는 부분(프로그래밍 가능성)은 안쪽에 묻고, 겉은 누구나 바로 쓰는 예쁜 문서 앱으로 내놓는 것이다.
2016년에 다시 쓴 노션 1.0은 호평 속에 출시됐고, 입소문을 타고 반등했다. 망했을 때와 살아났을 때의 차이는 세 겹이었다. 남의 미완성 기술 대신 자체 엔진을 깔았고, 도구임을 자랑하는 대신 숨겼으며, 기능을 하나씩 구현하는 대신 ‘모든 게 블록’이라는 언어를 지었다. 비전은 손대지 않았다. 그 비전을 제대로 구현해 사람들에게 건네는 방법만 바뀌었다.
거창한 족보의 그림자
여기까지가 노션이 스스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런데 거대한 사상적 계보를 자처할수록, 현실과의 간극도 같이 커진다. 노션에는 그 간극을 겨누는 비판이 줄곧 따라붙는다.
첫째, 팔방미인이지만 어느 것 하나도 일인자는 못 된다는 지적이다. 노션은 문서·위키·프로젝트 관리에 두루 쓸 만하지만, 메모는 전용 메모 앱을, 표는 전용 데이터베이스 도구를 끝내 이기지 못한다. 범용성의 대가로 모든 영역에서 2등이라는 것이다.
둘째, 더 날카로운 비판은 ‘도구를 만드는 도구’가 실은 마케팅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상은 사용자가 자기 도구를 만든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용자가 하는 일은 노션이 미리 정해 준 블록 메뉴에서 고르고 배치하는 것에 가깝다. 진짜 ‘도구를 만드는 도구’의 계보, 곧 스프레드시트나 프로그래밍 언어는 사용자에게 본격적인 논리와 자동화를 쥐여 줬다. 노션은 그 지점이 약하다. 복잡한 조건 분기나 자동화는 한계가 분명하고, 결국 대다수 사용자에게 노션은 콘텐츠를 만들고 들여다보는 데서 멈춘다.
셋째, 가장 역설적인 대목이 있다. 자오가 첫 실패에서 배운 교훈은 ‘사람들은 도구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니 숨겨라’였다. 그런데 이 성공 전략이 곧 비판의 근거가 된다. 대다수에게 노션이 그냥 예쁜 문서 앱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도구를 만드는 도구’라는 이상을 실제로 발휘하는 건 일부 열성 사용자뿐이고, 나머지에겐 정확히 콘텐츠 도구로 소비된다. 숨겨서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가, 결국 콘텐츠 툴 아니냐는 물음의 가장 강한 증거인 셈이다.
이 비판들이 유독 매서운 이유는 따로 있다. 노션이 엥겔바트와 케이라는 높은 기준을 스스로 자기 잣대로 세워 뒀기 때문이다. 평범한 생산성 앱이라면 “느리다”, “표가 약하다” 정도의 평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지능의 증강’을 약속한 회사는 다른 자로 재어진다.
도구의 이상은 시험대에 오른다
매클루언에서 시작해 케이를 지나 노션에 이른 생각, 곧 도구가 사람의 사고를 빚으니 사람에게 자기 도구를 빚을 재료를 주자는 생각은 매혹적이다. 하지만 매혹적인 만큼, 닫힌 구독형 소프트웨어라는 현실과의 거리도 멀다. 노션의 이야기는 그 이상과 현실이 밀고 당기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긴장은 최근 들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시험대에 올랐다. AI 에이전트, 곧 사람을 대신해 일을 수행하는 AI가 문서를 직접 읽고 쓰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자기 도구를 빚는다’던 전제 자체가 흔들린다. 이제 도구를 다루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에이전트라면, 노션의 블록은 자산일까 족쇄일까? 도구가 사람을 빚는다던 명제는, 에이전트의 시대에 어떻게 다시 쓰여야 할까.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 간다.
도구에 생각의 실행은 맡길 수 있어도 이해까지 넘길 수는 없다는 이야기는 AI에게 생각은 위임해도, 이해는 위임할 수 없다에서, 도구가 조직의 모양을 바꾸는 이야기는 조직 구조의 분류와 진화에서 다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