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도 에이전트와 함께 썼다. 자료는 에이전트가 모았고, 초안에서 막힌 대목은 같이 뚫었고, 영어판은 에이전트가 옮긴 것을 내가 손봤다. 그런데도 지금 읽고 있는 이 문장이 누구 것이냐고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내 것이라고 답한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가 이 글의 주제다.
방식 자체는 단순하다. 무엇을 왜 쓸지는 내가 정한다. 어떤 관점으로 볼지, 어떤 문장을 살리고 버릴지도 내가 정한다. 그 사이에 놓인 노동, 곧 흩어진 자료를 모으고 초안의 빈칸을 메우고 다른 언어로 옮기고 검색에 걸리도록 다듬는 일은 에이전트에 맡긴다. 그리고 돌아온 것을 한 줄씩 다시 읽고 고친다. 시작과 끝을 내가 잡고, 가운데만 넘기는 셈이다.
무엇이 좋아졌나
이렇게 일하면서 세 가지가 달라졌다.
먼저 빨라졌다. 정확히는 막힘이 줄었다. 글이 늦어지는 건 대개 타자가 느려서가 아니라 첫 문장을 못 떼서, 혹은 중간 어디선가 발이 묶여서다. 막힌 자리에서 에이전트에게 이 대목을 한 번 풀어보라고 던지면, 돌아온 초안이 좋든 나쁘든 멈춰 있던 바퀴가 다시 돈다. 와튼스쿨의 에단 몰릭은 이걸 막힘 돌파(unblocking)라 불렀다. 그가 쓴 책에서도 에이전트가 만든 문장이 그대로 실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결과물을 베끼는 게 아니라, 멈춤에서 빠져나오는 발판으로 쓰는 것이다.
다음은 뜻밖의 변화인데, 사고가 넓어졌다. 에이전트는 지치지 않고 맞받아 주는 상대다. 내 주장에 반론을 미리 뱉어보게 시키고, 낯선 분야의 지형을 빠르게 훑게 하고, 내가 놓쳤을 반대 사례를 물어본다. 혼자 쓰면 내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만 맴돌기 쉬운데, 그 테두리를 자꾸 두드려 주는 상대가 늘 곁에 있는 것과 같다. 물론 이건 돌아온 대답을 내가 따져 읽을 때만 작동한다. 이 단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끝으로 더 멀리 나눌 수 있게 됐다. 한국어로 쓴 글을 영어로 내보내는 일은 예전엔 그 자체로 며칠짜리 일이었다. 지금은 초벌 번역을 받아 내가 다듬으면 된다. 2026년 학술지 《Learned Publishing》에 실린 조사에서, 25개 언어권 연구자 105명에게 물었더니 비영어권 연구자들이 AI를 가장 많이 쓰는 용도는 문법 교정(72%), 문체 다듬기(63%), 번역(45%) 순이었다. 언어의 문턱이 낮아지면 글이 닿는 거리가 늘어난다. 다만 그 연구는 단서를 함께 달았다. AI의 제안을 평가하려면 그것을 판단할 만큼의 언어 능력이 여전히 사람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건너뛰면 무엇이 닳는가
여기까지면 좋은 소식이다. 그런데 글을 잘 쓰는 사람일수록 이 방식을 경계한다. 걱정은 한 곳으로 모인다. 쓰는 행위 자체가 곧 생각하는 일인데, 그걸 건너뛰면 생각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같은 두려움을 세 사람이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말했다.
에세이스트 폴 그레이엄은 글쓰기와 사고를 아예 한 몸으로 본다.
“To write well you have to think clearly, and thinking clearly is hard.” (잘 쓰려면 명료하게 생각해야 하고, 명료하게 생각하는 건 어렵다.) — 폴 그레이엄, “Writes and Write-Nots” (2024)
그래서 그는 머지않아 세상이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으로 갈리고, 그 분할이 곧 생각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의 분할이 될 거라고 했다. 글쓰기를 놓는 순간 생각하는 능력 자체가 함께 위축된다는 경고다. 그가 인용한 레슬리 램포트의 말이 이걸 압축한다. 쓰지 않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뿐이라고.
테드 창이 짚는 손실은 다르다. 그는 글을 수많은 선택이 쌓인 결과로 본다.
“Your first draft isn’t an unoriginal idea expressed clearly; it’s an original idea expressed poorly.” (당신의 초고는 진부한 생각을 명료하게 쓴 게 아니라, 독창적인 생각을 서툴게 쓴 것이다.) — 테드 창, 〈Why A.I. Isn’t Going to Make Art〉 (2024)
초고의 그 서투름을 헤매는 과정이 곧 생각하는 과정인데, 평균값을 매끈하게 뽑아 주는 도구로 그 과정을 건너뛰면 독창성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작가 코리 닥터로는 더 근본적인 곳을 건드린다. 그는 이런 도구를 그럴듯한 문장 생성기(plausible sentence generator)라 불렀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문장과 옳은 문장은 다른데, 도구 덕에 문장을 뽑아내기는 쉬워져도 그게 옳은지 가려내는 일은 조금도 쉬워지지 않는다. 생산과 검증 사이의 이 비대칭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갈림길은 감독이다
이 걱정은 옳다. 다만 조건이 붙는다.
쓰는 행위를 건너뛰면 생각이 닳는다는 말은, 정확히는 검증까지 건너뛸 때 참이 된다. 갈림길은 하나다. 감독이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그 갈림길을 닥터로 본인이 같은 글에서 가장 날카롭게 벼려 놓았다.
“if we don’t understand a subject, then we won’t be qualified to evaluate the summary, either.” (어떤 주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요약을 평가할 자격도 없다.) — 코리 닥터로
이 문장을 뒤집으면 내가 일하는 규칙이 된다. 나는 내가 이해하는 것만 쓸 수 있다. 그 너머는 에이전트가 아무리 그럴듯한 문장을 가져와도 내가 옳은지 그른지 가릴 수 없고, 가릴 수 없는 글에는 내 이름을 걸 수 없다. 앞에서 미뤄 둔 단서가 여기서 풀린다. 에이전트가 사고를 넓혀 주는 것도, 돌아온 대답을 내가 따져 읽을 때에만 일어난다. 따지지 못하는 대답은 사고를 넓히는 게 아니라 빈칸을 그럴듯하게 가리는 일일 뿐이다.
그래서 저자가 누구냐는 질문의 답은 누가 타이핑했느냐가 아니다. 누가 마지막에 이게 맞다고 책임지느냐다. 미국과 유럽의 저작권법이 보호의 기준을 사람의 실질적 기여에 두는 것도 같은 직관에서 나온다. 손가락이 아니라 판단이 저자를 만든다.
받아쓰기와 협업의 차이도 정확히 여기서 갈린다. 받아쓰기는 검증을 건너뛴 것이고, 협업은 검증을 끝까지 내가 쥔 것이다. 불러 주는 대로 받아 적기만 하면 그건 불러 준 쪽의 글이다. 불러 주는 걸 듣되 한 줄씩 내가 따져 적으면 그건 내 글이다.
펜은 내가 쥔다
나는 전에 이해는 위임할 수 없다고 썼다. 생각의 실행은 남에게 넘겨도 결과가 나오지만, 그 일을 떠받치는 이해는 넘기는 순간 내 안에서 비어 버린다는 이야기였다. 글쓰기는 그 원칙이 가장 정직하게 드러나는 자리다. 도구가 표면을 아무리 빨리 날라도, 이게 맞는지 묻고 내 이름을 걸어 내보내는 마지막 결정만은 건너가지 않는다. 그 한 줄을 내가 쓰는 한, 이 글은 내 것이다.
이 글의 맨 위에 걸어 둔 렘브란트의 그림을 다시 본다. 늙은 복음서 저자 마태가 책 앞에 앉아 있고, 천사가 등 뒤에서 귓가에 무언가를 불어넣는다. 그러나 펜을 쥐고 종이에 글자를 긋는 손은 마태의 것이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흘려보낼지, 끝내 무엇을 적을지를 정하는 것도 그다.
천사는 곁에서 속삭인다. 펜은, 여전히 내가 쥔다.
— tom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