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필경사는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몇 달을 책상에 붙어 있었다. 한 글자씩 옮겨 적고, 다 적은 뒤엔 원본과 한 줄씩 대조해 틀린 곳을 고쳤다. 느리지만 분명한 장점이 하나 있었다. 그렇게 검수를 마치고 묶인 책은 더 이상 바뀌지 않는다. 누구도 어젯밤 몰래 한 문장을 고쳐 놓을 수 없었다. 책에 적힌 것은 확정된 것이었다.
앞 글에서 노션이 어떤 사상 위에 세워졌는지를 봤다. 도구가 사람의 사고를 빚으니, 사람에게 자기 도구를 빚을 재료를 주자는 생각이었다. 그 모든 전제에는 조용한 가정이 하나 깔려 있었다. 도구를 다루는 주체는 사람이라는 가정이다. 그런데 이 가정이 지금 흔들린다. 문서를 읽고 쓰는 일을 사람이 아니라 AI 에이전트가 점점 더 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필경사의 책이 지녔던 그 오래된 미덕, 곧 한번 확정되면 바뀌지 않는다는 성질이 갑자기 다시 중요해졌다.
에이전트는 다른 문서를 원한다
여기서 ‘AI 에이전트’란 사람을 대신해 일을 수행하는 AI를 말한다. 사람이 시킨 한 가지에 답하고 마는 게 아니라, 문서를 찾아 읽고, 코드를 고치고, 결과를 다시 문서에 적는 식으로 여러 단계를 스스로 밟는다. 이런 에이전트가 일의 주역이 되면, ‘좋은 문서’의 기준이 사람일 때와 달라진다.
사람에게 좋은 문서는 보기 편한 문서다. 색이 입혀지고, 표가 예쁘게 정렬되고, 한눈에 들어오는 문서. 노션이 잘하는 게 정확히 이것이다. 그런데 에이전트에게 좋은 문서는 다루기 편한 문서다. 빠르게 읽히고, 정확히 어느 부분이 바뀌었는지 보이고, 신뢰할 수 있는지 판단이 서는 문서. 이 기준에서는 오래된 기술이 오히려 앞선다. 마크다운(markdown) 과 git이다.
마크다운은 서식을 텍스트만으로 적는 가벼운 형식이다. 제목 앞에 #을 붙이고 강조할 말을 기호로 감싸는 식이라, 파일 자체가 사람도 기계도 그냥 읽을 수 있는 글자 덩어리다. git은 그 파일들의 변경 이력을 관리하는 도구다. 누가 언제 무엇을 왜 바꿨는지가 한 줄씩 기록되고, 특정 시점의 상태를 통째로 도장 찍어 보관한다. 둘을 합치면 문서가 코드처럼 다뤄진다. 흔히 ‘문서를 코드처럼 관리한다(docs-as-code)‘고 부르는 방식이다.
에이전트 입장에서 이 조합은 거의 이상적이다. 파일이 그냥 텍스트라 수십 개를 순식간에 읽어 들이고, 원하는 단어를 단번에 찾는다. 무엇이 바뀌었는지는 변경 이력에 정확히 남아 있다. 노션처럼 화면을 띄우고 블록을 하나씩 받아 그릴 필요가 없다.
노션 블록의 두 가지 약점
노션은 모든 것을 ‘블록’이라는 단위로 저장한다. 앞 글에서 본 그 우아한 구조다. 그런데 사람이 아니라 에이전트가 문서를 다루기 시작하면, 같은 구조가 두 군데서 발목을 잡는다.
첫째, 느리다. 노션의 모든 것은 블록이고, 블록은 노션 서버에 차곡차곡 쌓인 데이터다. 문서 하나를 열려면 그 데이터를 통째로 받아 화면으로 조립해야 한다. 사람은 한 페이지를 열고 읽는 동안 이 시간이 거슬리지 않지만, 문서 수십 개를 빠르게 훑는 에이전트에게는 매번 서버를 오가는 이 왕복이 고스란히 비용이 된다. 텍스트 파일을 곧바로 읽는 쪽과는 속도 차이가 크게 벌어진다.
둘째, 그리고 이게 더 본질적인데, 확정된 버전이 없다. 에이전트가 어떤 문서를 ‘이게 맞다’고 믿고 그대로 일하려면, 그 문서가 진실의 기준(source of truth) 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에이전트가 읽은 그 버전을 나중에 똑같이 다시 가리킬 수 있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그 내용이 검토를 거쳐 믿을 만하다는 보증이 있어야 한다. 노션에는 이 둘이 구조적으로 없다.
git에서는 문서의 변경이 곧장 반영되지 않는다. 누군가 고친 내용은 먼저 검토 요청(pull request)으로 올라가고, 다른 사람이 들여다보고 승인해야 비로소 공식 문서에 반영된다. 그렇게 반영되는 순간 그 상태는 하나의 시점으로 도장 찍혀 얼어붙는다. 그래서 공식 문서에 있는 내용은 ‘누군가 검토하고 통과시킨 것’이라는 신뢰 등급을 자동으로 얻고, 에이전트는 “그 시점의 그 버전”을 언제든 똑같이 다시 가리킬 수 있다.
노션은 정반대다. 누구나 아무 때나 문서를 바로 고친다. 검토를 통과한 확정본과 방금 누군가 끄적인 추측이 화면에서 구분되지 않는다. 게다가 문서는 늘 살아 움직여서, 에이전트가 30분 전에 읽은 그 버전을 다시 가리킬 방법이 없다. 늘 편집 가능하고 협업적이라는 노션의 성질은 사람에게는 분명한 장점이다. 그런데 진실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순간, 바로 그 점이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사내 문서를 가벼운 마크다운과 git 쪽으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나오는 것도, 결국 이 둘 때문이다. 너무 느리다는 것, 그리고 노션 문서는 늘 바뀔 수 있고 검증 단계가 없어 ‘정확한 기준’으로 삼기 어렵다는 것. 사람의 편의를 위해 설계된 성질이, 에이전트의 신뢰를 위한 자리에서는 약점으로 뒤집힌다.
그런데 블록이 약점이기만 할까
흥미로운 반전이 하나 있다. 노션 블록의 그 구조성이, 다른 각도에서는 오히려 에이전트에게 유리한 자산이 된다.
마크다운은 자유롭지만 모호하다. “이 표의 세 번째 항목을 고쳐”라고 정확히 짚기가 어렵다. 그냥 글자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반면 노션은 모든 블록이 저마다 고유한 표식과 타입을 가진 단위다. 그래서 에이전트가 “이 블록을 이렇게 바꿔”라고 정밀하게 조준하기에는 오히려 더 낫다. 앞 글에서 본 ‘모든 게 블록이면 그것은 언어’라는 통찰이, 에이전트 시대에는 ‘에이전트가 정확히 호출할 수 있는 구조화된 창구’라는 뜻으로 다시 읽히는 셈이다.
그러니 노션의 블록은 약점이자 동시에 자산이다. 이 양면성이 노션의 대응 전략 전체를 결정한다.
노션의 응수: 사람의 화면에서 에이전트의 뒷마당으로
노션은 ‘md 흐름에 맞서 블록을 사수한다’는 식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블록은 안쪽에 그대로 두고, 경계에 에이전트가 드나들 다리를 놓았다. 2026년 5월에 발표한 것들이 이 방향을 분명히 보여준다.
- 에이전트 접속 창구(MCP). 클로드나 커서 같은 외부 에이전트가 노션 작업공간을 직접 찾고, 읽고, 고칠 수 있게 하는 표준 연결 통로를 열었다. 에이전트가 노션을 직접 다루기 어렵다는 약점을, 표준 창구로 메운 것이다.
- 마크다운으로 받아쓰기. 에이전트가 익숙한 마크다운으로 내용을 던지면 노션이 알아서 블록으로 바꿔 넣는다. 바깥은 마크다운, 안쪽은 블록. 양다리 전략의 핵심이다.
- 노션 자체 워커(Notion Workers)와 커스텀 에이전트. 노션 안에서 도는 작은 자동화 프로그램(워커)으로 외부 데이터를 끌어오고, 별도 서버 없이 자동화 도구를 만들고, 조직 안에서 반복 질문이나 분류 작업을 도는 에이전트를 둔다. 노션 창업자 아이번 자오(Ivan Zhao)가 내건 구호는 “어떤 데이터든, 어떤 도구든, 어떤 에이전트든(Any data, any tool, any agent)“이다.
방향을 한 줄로 줄이면 이렇다. 노션은 사람이 들여다보는 화면에서, 에이전트가 읽고 쓰는 뒷마당으로 자기 자리를 옮기는 중이다. 자오가 흘린 수치 하나가 이 전환을 압축한다. 노션에서 만들어지는 데이터베이스의 절반 이상이 이미 사람이 아니라 에이전트의 손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전선은 어디서 갈리는가
그렇다고 노션이 모든 싸움을 이기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전선을 의식적으로 나눈다.
흩어진 마크다운 파일은 개인의 일에는 강하지만 조직의 일에는 약하다. 혼자 글을 쓰고 코드를 다루는 데는 가벼운 텍스트와 git이 거의 무적이다. 노션이 여기서 이길 이유는 없고, 그래서 다리(앞의 MCP)로 연결만 해 둔다. 하지만 여러 사람과 여러 에이전트가 같은 지식을 동시에 읽고 갱신하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가 무엇을 볼 수 있는지(권한), 항목들이 어떻게 엮이는지(관계), 누가 언제 바꿨는지(이력)를 한곳에서 관리해야 한다. 흩어진 텍스트 파일로는 닿기 어려운 영역이고, 노션은 정확히 여기에 전력을 건다.
자오가 다음 과제로 지목한 것도 이 지점이다. 개별 에이전트 하나를 잘 만드는 게 아니라, 수십에서 수백 개의 에이전트로 이뤄진 ‘공장’ 을 한 조직이 어떻게 운영하고 관리하느냐. 노션은 자기를 그 통제탑, 곧 권한과 협업과 감사가 모이는 자리로 세우려 한다.
노션의 베팅, 그리고 급소
이 전략에는 분명한 급소가 있다.
문서를 다루는 주체가 에이전트로 넘어가면, 노션이 오래 쥐고 있던 무기 하나가 무력해진다. 예쁜 화면이다. 사람은 보기 좋은 작업공간에 정이 들어 잘 떠나지 않지만, 에이전트는 화면이 예쁜지 따지지 않는다. 그냥 다루기 깔끔한 쪽을 고른다. 그러면 노션은 자칫 ‘여러 저장소 중 하나’로 값이 깎일 위험에 놓인다. 사람을 붙잡아 두던 매력은 고객이 에이전트로 바뀌는 순간 쓸모가 없어진다.
그래서 자오의 응수는 결국 한 문장에 회사를 거는 일이다. 여러 사람과 에이전트가 함께 쓰는 조직의 지식이라면, 구조와 협업과 권한을 한곳에 묶어 주는 노션이 흩어진 마크다운 파일을 이긴다. 이 베팅이 맞으면 노션은 AI 시대 조직 지식의 바탕 레이어가 되고, 틀리면(에이전트가 그냥 가벼운 텍스트와 git을 골라 노션을 비껴가면) 앞 글에서 본 ‘결국 닫힌 문서함 아니냐’는 오랜 비판이 현실이 된다.
도구가 우리를 빚는다, 다시
1편의 출발점은 매클루언의 문장이었다. 우리가 도구를 빚고, 그다음엔 그 도구가 우리를 빚는다. 그 문장은 줄곧 사람을 주어로 삼고 있었다. 도구를 빚는 것도 사람, 그 도구에 빚어지는 것도 사람.
에이전트의 시대는 이 문장을 비튼다. 도구를 빚고 다루는 손은 점점 에이전트의 것이 되는데, 그 도구에 빚어지는 건 여전히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들지도 손대지도 않은 도구가, 그래도 우리의 생각을 빚는 셈이다. 노션이 블록을 사람의 화면에서 에이전트의 뒷마당으로 옮기는 일도 그래서 한 회사의 제품 전략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더 이상 직접 만지지 않는 도구가 우리를 어떻게 빚을지, 그 물음의 작은 한 장면이다.
도구에 일의 실행은 맡겨도 이해까지 넘길 수는 없다는 이야기는 AI에게 생각은 위임해도, 이해는 위임할 수 없다에서, 에이전트가 조직의 모양 자체를 바꾸는 이야기는 조직 구조의 분류와 진화에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