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의 세 권,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넥서스』는 표지만 보면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룬다. 하나는 인류의 과거, 하나는 인류의 미래, 하나는 정보의 역사다. 그런데 셋을 잇따라 읽고 나면 묘한 의심이 든다. 이 사람, 결국 같은 얘기를 계속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의심은 옳다. 세 권은 하나의 아이디어의 변주다. 그 아이디어 하나가 석기시대부터 챗봇까지를 관통한다. 좋은 사상가의 책을 제대로 읽는 일은 그가 쥔 단 하나의 열쇠를 찾아내는 데서 시작한다. 그 열쇠가 무엇인지, 왜 그렇게 많은 문을 여는지, 그리고 어떤 문 앞에서 멈춰 서는지를 따라가 보자.

하나의 문장: 인간은 허구를 함께 믿어 협력한다

하라리의 열쇠는 한 문장으로 줄어든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한 것은 더 힘세거나 똑똑해서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을 함께 믿을 수 있어서다.

다른 동물도 소통은 한다. 원숭이도 “사자다, 도망쳐”라고 외친다. 사피엔스만 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있다. “우리 부족을 지키는 수호령이 있다”처럼, 눈앞에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을 여럿이 동시에 믿는 일이다. 침팬지 무리의 협력은 서로 아는 수십 마리가 한계다. 반면 같은 신, 같은 나라, 같은 화폐를 믿는 사람들은 생판 모르는 사이에도 함께 성당을 짓고 군대를 꾸리고 거래를 한다.

하라리는 이런 공유된 믿음의 산물을 **상호주관적 실재(inter-subjective reality)**라 부른다. 세상의 존재를 세 층으로 갈라 보면 이 개념이 놓이는 자리가 분명해진다.

  • 객관적 실재: 중력이나 바위처럼, 내가 안 믿어도 그대로 있는 것
  • 주관적 실재: 내 두통처럼, 나 한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
  • 상호주관적 실재: 돈·국가·신·인권·회사처럼, 많은 사람이 함께 믿어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

돈이 좋은 예다. 지폐는 모두가 그 가치를 믿기를 멈추는 순간 그냥 종잇장이 된다. 국가도, 회사도, 인권도 그렇다. 어디에도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충분히 많은 사람이 믿는 한, 그것은 바위만큼이나 단단하게 우리 삶을 떠받친다. 『사피엔스』 전체가 이 한 문장의 확장이다. 문명은 객관적 진실 위에 서 있지 않다. 함께 믿기로 한 거대한 허구가 그 토대다.

같은 열쇠, 두 번째 문: 『호모 데우스』

『호모 데우스』는 같은 열쇠를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 『사피엔스』가 “허구가 우리를 어떻게 일으켜 세웠나”를 봤다면, 이번엔 “그 허구가 무너지면 어떻게 되나”를 본다.

지난 300년간 세계를 떠받친 허구는 인본주의였다. 핵심 교리는 “인간의 감정과 선택이 최고의 권위”라는 믿음이다. 정치에서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 했고(민주주의), 시장에서는 고객이 늘 옳다 했고(자본주의), 윤리에서는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 했다(개인주의). 이 모든 것은 “내 안에 진정한 자아와 자유의지가 있다”는 전제에 얹혀 있다.

하라리는 그 전제가 흔들리는 중이라고 본다. 뇌과학이 그리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영혼과는 거리가 멀다. 뉴런과 호르몬이 돌리는 생화학 알고리즘에 더 닿아 있다. 우리의 감정도 선택도, 따지고 보면 그 화학 작용이 처리한 계산의 출력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느낌이 진리”라는 인본주의의 토대도 함께 흔들린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새 믿음이 **데이터교(Dataism)**다. 정보의 흐름 그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떠받드는 세계관으로, 인간도 결국 데이터를 처리하는 하나의 시스템일 뿐이라고 본다. 하라리는 권위가 옮겨가는 경로를 이렇게 그린다. 신에게 묻던 시대에서, 내 마음에 묻는 시대를 거쳐, 이제 알고리즘에게 묻는 시대로. 넷플릭스가 내가 볼 것을, 추천 알고리즘이 내가 살 것을 나보다 잘 맞히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결정을 알고리즘에 넘긴다. 인본주의가 모셔온 ‘신성한 개인’이 그렇게 해체된다.

주제는 미래로 바뀌었지만 도구는 똑같다. 자유의지도, 개인도, 결국 우리가 함께 믿어온 허구라는 것.

세 번째 문: 『넥서스』

가장 최근 책 『넥서스』는 열쇠를 AI에 꽂는다. 부제가 “석기시대부터 AI까지, 정보 네트워크의 짧은 역사”다.

여기서 하라리는 통념 하나를 깬다. 우리는 흔히 “정보가 많아지면 진실에 가까워진다”고 믿는다. 그는 이를 순진한 생각이라 본다. 정보의 본질은 진실이 아니라 연결이다. 틀린 정보, 신화, 선전도 사람을 묶는다. 오히려 단순한 거짓이 복잡한 진실보다 더 강하게 묶을 때가 많다. 『사피엔스』의 ‘공유된 허구’를 정보의 언어로 다시 쓴 셈이다.

그 위에 『넥서스』가 새로 얹는 단 하나의 진짜 단절이 있다. 지금까지 모든 정보기술, 곧 문자·인쇄기·라디오·인터넷은 인간이 만든 정보를 나르기만 하는 수동적 통로였다. AI는 다르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스스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라리는 그래서 “컴퓨터는 도구가 아니라 행위자(agent)“라고 못 박는다. 지금까지 허구를 지어 사회를 묶는 일은 오직 인간만 할 수 있었는데, 이제 인간이 만든 것이 그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열쇠 — ‘허구’: 함께 믿는 이야기 사피엔스 허구로 협력한다 호모 데우스 자유의지도 허구 넥서스 AI가 허구를 짓다 과거 미래 AI
세 권은 표면 주제가 다르지만, '인간은 허구를 함께 믿어 협력한다'는 하나의 실이 모두를 꿴다. 사피엔스는 그 실로 과거를, 호모 데우스는 미래를, 넥서스는 AI를 묶는다.

세 권을 한 줄로 꿰면 이렇게 된다. 인간이 허구를 만들어 세상을 지배했고(사피엔스), 그 힘으로 이제 자기 자신을 다시 설계하려 하고(호모 데우스), 그렇게 만든 AI가 스스로 허구를 짓는 첫 비인간 행위자가 됐다(넥서스). 만드는 자와 만들어지는 것 사이의 경계가 한 권씩 지날 때마다 흐려진다.

열쇠의 위력: 왜 이 렌즈가 강력한가

하나의 개념으로 이렇게 멀리 가는 것은 분명한 성취다. ‘공유된 허구’라는 열쇠는 평소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한꺼번에 낯설게 만든다. 돈은 왜 금속 쪼가리인데 작동하는가? 집단적 믿음 때문이다. 왜 인간만 대규모로 협력하는가? 공유된 허구 덕이다. AI는 왜 위험한가? 허구를 짓는 권력이 처음으로 인간을 떠나기 때문이다. 서로 무관해 보이던 물음들이 같은 답을 향해 정렬된다.

이 낯설게 하기에는 묘한 쾌감이 있다. “국가는 상상이다”, “인권은 지어낸 이야기다” 같은 문장은 익숙한 세계를 한 번 뒤집어 보여준다. 그 감각이 세 권을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만든 동력이기도 하다. 단순한 것이 늘 얕은 것은 아니다. 하나의 열쇠로 이만큼 멀리 간 것은 그 자체로 미덕이다.

열쇠가 못 여는 문: 한계

그러나 모든 문을 하나의 열쇠로 열려는 시도에는 대가가 따른다. 전문가들이 하라리를 비판하는 지점이 정확히 여기다. 세 갈래로 정리된다.

첫째, 모든 것을 ‘허구’로 뭉뚱그리는 것은 지나치다. 철학자 존 설(John Searle)은 돈 같은 것을 ‘허구’가 아니라 **제도적 사실(institutional fact)**이라 부른다. 소설 속 용은 진짜로 존재하지 않지만, 돈은 사회적 약속으로서 진짜로 작동하고 진짜 결과를 낳는다. 지어낸 것과 합의로 실재하는 것은 다르다. 둘을 같은 ‘허구’라는 단어에 욱여넣으면, 그 사이의 중요한 차이가 지워진다.

둘째, 환원주의의 함정이다. “인간은 허구로 협력한다”는 매력적이지만, 협력에는 허구가 아닌 토대도 크게 작용한다. 혈연, 직접적인 호혜, 얼굴을 아는 신뢰가 그렇다. 모든 협력을 허구 하나로 설명하려다 보면, 그 틀에 안 맞는 사례를 슬그머니 건너뛰게 된다. 매끄러운 큰 그림을 위해 울퉁불퉁한 반례를 깎아내는 것이다.

셋째, 도덕적 허무주의의 위험이다. 인권과 정의를 “그냥 허구”라 부르면, 인권 침해를 비판할 근거도 함께 약해지지 않는가. 하라리는 “허구지만 유용한 허구”라고 방어하지만, 비판자들은 “유용함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 역시 허구가 아닌가”라고 되묻는다. 모든 가치를 평평하게 허구로 깔아버리면, 발 디딜 단단한 땅이 사라진다.

하라리 자신도 이 비판을 안다. 그래서 그는 “내 책도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인정한다. 영리한 방어다. 그러나 동시에 빠져나갈 구멍이기도 하다. “내가 허구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허구”라고 하면 모든 반박이 헛돈다. 자기 이론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면 무한 루프에 빠지는데, 이는 “모든 것은 X다” 형태의 모든 거대 이론이 공유하는 약점이다.

저자의 단 하나의 빅 아이디어를 발라내며 읽기

그래서 하라리는 이렇게 읽는 것이 가장 좋다. 거대한 패턴을 보는 망원경으로는 최고다. 다만 그 망원경에는 ‘허구’라는 단 하나의 렌즈만 끼워져 있어서, 그 렌즈에 잡히지 않는 것들, 곧 생물학적 실재, 제도와 허구의 차이, 우연, 물질적 조건은 흐릿하게 보인다.

이것은 하라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큰 사상가를 읽는 일반적인 기술이다. 좋은 저자일수록 세계를 꿰뚫는 강력한 단일 렌즈를 가진다. 그 렌즈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내면,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해진다. 그 렌즈로 선명하게 보이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일, 그리고 그 렌즈가 흐리게 만드는 것을 따로 챙겨 두는 일이다.

“이 사람의 단 하나의 빅 아이디어는 무엇인가.” 이 물음 하나를 손에 쥐면, 저자에게 끌려다니는 대신 저자와 거리를 두고 읽게 된다. 책에 설득당하는 독서와 책을 해부하는 독서를 가르는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이 질문의 유무다. 하라리의 세 권은, 그 해부를 연습하기에 더없이 좋은 교재다. 워낙 솜씨 좋게 하나의 열쇠를 휘두르기 때문에, 그 열쇠의 모양이 오히려 또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 tom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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